장발장은행장, ‘소박한 자유인’ 발기인 각 정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승리한 이들은 환한 웃음과 함께 양팔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그 하늘은 어제도 오늘도 희뿌옇다. (초)미세먼지는 한국 땅 어느 한 곳 빈틈없이 침투하는데 대책은 없고 경보만 울린 지 오래다. “가난은 나라도 못 구한다”는 잘못된 통념과 함께 무능한 정치에 면죄부를 줄 또 하나의 꺼리가 생긴 셈이다. 워낙 비관적 전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일까, 현란한 수사와 장밋빛 약속으로 가득한 경선 승리자들의 후보 수락 연설은 나에게 피할 데도 없고 해결 가능성도 없는, 그래서 사회구성원 모두가 이미 포기한 채 받아들이는 희뿌연 하늘 아래가 아닌, 딴 세상에서 벌어지는 스펙터클의 한 장면처럼 다가왔다. 다음 세대에겐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바라본 추억조차 없으리란 점을 강조하면서 지금까지 일변도로 추구해온 성장주의가 부메랑으로 돌아온 희뿌연 하늘 아래 우리 모두 겸손해져야 한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사회를 보듬는 게 정치의 본령이라고 할 때, 대선 후보자들에게 화려한 말의 성찬에 비해 그 구체적 실현의 어려움에 대한 인식과 성찰적 태도가 부족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번 대선의 후보자들은 반사이익의 수혜자들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등 집권세력의 국헌 문란과 법률 위반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촛불로 타오르기까지, 일부 언론에 비해 정치적 지도자로서 무슨 역할을 했는지 스스로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또 적폐 세력과 그동안 제대로 싸워왔는지에 대해서도 스스로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지금 와서 적폐를 청산하겠다고 쉽게 말하지만, 그에 앞서 그 적폐의 토대, 나아가 적폐의 구성에 작은 몫이라도 하지 않았는지를 기존체제의 수동적 구성자로서 반성하는 모습이 전제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장래를 설계하기 어려운 ‘흙수저’들, ‘프레카리아트’들, ‘헬조선’의 젊은 ‘N포’ 세대에게 기성세대의 일원으로서 가져야 할 미안함은 긍정적 의미의 의욕이 넘친 탓으로 돌린다고 하더라도. 적폐 청산은 정상화를 가져올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 새로운 체제가 열리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 전제가 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국민과 함께”, “국민의 뜻에 따라”, “국민이 집권해야 정권교체” “국민의 나라” 따위의 그럴듯하지만 하나마나한 정치적 수사가 아니다. 국민이란 말은 하루 평균 5명이 산재로 사망하고 37명이 자살하는 국민을 말할 때 사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또 싱크탱크 요원이 1천명이 넘는다는 위세도 아니다. 그들 모두에게 조언을 구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그 대부분은 논공행상 대기자들에 가깝다. 가령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3월28일 “문재인 후보의 교육 공약은 대통령 탄핵 이후 새 시대를 갈망하는 국민의 목마름을 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싱크탱크 구성원의 숫자가 많은 게 대수가 아님을 보여준 예가 될 것이다. 이 시점에 정치지도자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형용모순 같지만 차라리 ‘마키아벨리의 겸손함’이다. 비정상-반노동-반인권으로 점철된 이명박-박근혜 정권과 맥을 달리하는 정치적 공인으로서 사회변화를 기어이 이루겠다는 마키아벨리적 ‘비르투’(덕목)의 출발점은 “나 혼자!”라는 오만성과 “나중에!”라는 비겁함에서 벗어나는 데 있다. 지난 2월, 만 18세 선거권, 비례대표제 등 선거법 개정의 호기라고 자타가 말했고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라고 수없이 외쳤지만 속절없이 지나갔다. 국회에 남아 있는 수구세력의 반대와 국회선진화법의 장벽 때문이라고 변명했지만, “나 혼자!”와 “나중에!”가 법 개정의 절실함과 그것을 위한 교섭력을 약화시켰다는 게 진실에 가깝다. 그런데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후보와 국민의당의 안철수 후보는 지역 기반 이외에 정치철학과 정책 지향에 어떤 차이가 있어서 그렇게 다투는 것일까. 실상 정치이념상 차이보다는 감정적인 대립각이 더 큰데 몇 가지 요인이 이 점을 잘 드러나게 하지 않으면서 이념과 정책상에 차이가 있는 듯 만들어주고 있다. 구체적 의제와 사안에 관해 자신의 견해와 비전을 분명히 밝히기보다는 두루뭉술하게 드러내는 ‘모호성’이 그 하나이고, 차별금지법과 관련하여 문재인 후보가 보인 예처럼 ‘나중에!’를 외치며 뒤로 미루는 점이 또 다른 하나다. 가장 중요한 요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오로지 ‘나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오만성에 있다. 적절한 예는 아닐지라도, “타자를 존중하고 타자와 맺는 윤리적 관계가 나의 유한성을 극복할 수 있다”는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말을 경청하기를 바라는 것은 현 국회의 의석 분포로 볼 때 그래야 법제도 변화의 작은 가능성이라도 열 수 있기 때문이다. 일탈을 용인하지 않는 축제는 축제라 할 수 없음에도 수구세력에게 작은 빌미라도 주지 않으려고 애썼던 광장의 촛불시민들에 비추어볼 때, 문-안 두 후보와 두 정당은 ‘국민통합’을 외치기 전에 자신들부터 통합적 자세를 가져야 마땅하다. 먼 세력보다 가까운 세력에게 더 적대성을 보이면서 국민통합을 외친다는 것이 얼마나 모순에 찬 일인지 모른다고 할 것인가. 특히 안철수 후보는 국민의당 39석 소속 의원과 어떻게 “낡은 과거의 틀을 부숴버리고 미래를 여는 첫 대통령”이 되겠다고 호언하는 것일까. 한국과 비슷한 시기에 치러지는 프랑스 대선(1차 4월23일, 2차 결선투표 5월7일)에서 39살의 신예, 사회당에서 뛰쳐나와 만든 ‘전진’ 그룹의 대표 에마뉘엘 마크롱의 당선 가능성이 예상되고 있는데, 그들은 대선에 이어 6월에 의회선거를 치른다는 점에서 3년 동안 현 국회 의석 분포를 유지하는 우리와 다르다. 구질서는 물러났지만 새로운 질서는 아직 자리 잡히지 않은 위기이면서 기회의 시간, 그 핵심에 노동-경제 문제가 놓여 있다는 점에 많은 이가 동의할 것이다. 또 한국 경제의 전망이 어둡다는 데에도 많은 이가 동의할 것이다. 가계부채는 폭증했고 건설 부동산 경기와 자영업은 마지막 한계선에 다다랐으며 구조적 내수 부진 속에 지난 3년 동안 수출도 침체 경향이 두드러졌는데 트럼프 시대가 열리면서 더욱 악화될 것이다. 그 위에 사드 배치에 대한 중국의 보복으로 한국 경제는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위기에 처해 있다. 이처럼 엄중한 시기에, 재벌체제 개혁과 검찰, 국정원 등 사정·정보기관 개혁, 선거법 개정, 직접민주주의 강화, 교육혁명 등 구체적 방안을 놓고 경쟁하기보다 자칫 이전투구의 양상이라도 펼쳐진다면 정치에 대한 국민의 혐오감을 더욱 키우면서 수구세력에게 반격의 빌미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한편, 새누리당의 분열과 약화는 아직 진보정당의 강화로 연결되지 않고 있다. 분단체제 아래 극우적 수구세력이 약화될수록 그만큼 진보정당의 입지가 강화된다고 전망했던 사람들에게 반성적 성찰이 요구되는 지점이다. 그럼에도 유권자의 자리에서 볼 때 확연히 달라진 점이 있으니 사표 논리와 관련되는 것이다. 진보 후보에게 표를 주면 수구세력의 편을 들어주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자유주의 세력의 공격이 이젠 먹히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촛불혁명의 덕이다. 이젠 진보 후보보다 별 차이 없는 후보에게 표를 주는 쪽이 사표에 가까운 게 아닐까. 대선 투표일에도 희뿌연 하늘은 가시지 않겠지만 조금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투표장에 갈 것 같다.
연재홍세화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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