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연구자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대선 정국은 신속하게 끝났다. ‘촛불정신’은 너무나 빠르게 ‘정권교체’라는 말로 번역됐고, 그 타당성을 논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성폭력 모의 전력이 있는 홍준표 후보의 사퇴운동을 전격적으로 전개하지 못한 것, 차별금지법 제정을 둘러싼 후보들의 첨예한 토론을 진척시키지 못한 것이 특히 아쉽다. 그 와중에 ‘문재인 후보 지지 5·9선언’이라는 이름으로 전개된 문학인들의 행보를 되새길 만하다. 문재인 후보 지지를 호소하는 단체메일 발송, 문 후보에 대한 단행본 발간, 문 후보를 지지하는 문인들의 카드뉴스 및 문 후보 홍보 웹사이트 제작 등 이번 선거에서 문인들의 정치적 의사표시는 어느 때보다 가열찼다. ‘문단 성폭력’이라는 여전히 뜨거운 화두에 대해 대부분의 문인들이 철저히 침묵을 지킨 것에 비하면, 이번 문학인들의 적극적인 행보는 유별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테다. 물론 블랙리스트 사건을 경험한 문인들에게 이번 선거가 문화예술계 회생의 중차대한 계기일 수 있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들의 행보는 보기에 따라 매우 기이했고 실제로 논란이 됐다. 왜일까? 혹자는 ‘문인과 정치’라는 고색창연한 테제를 들어 이 비판의 내용을, ‘문학의 정치 참여’를 ‘문학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비합리적 믿음의 신봉자들이 제기하는 구태의연한 비난이라고 의미화했다. 그러나 이런 손쉬운 정리는 판단 착오이거나 비판의 논리를 의도적으로 왜곡하려는 혐의를 지닌 것처럼 보인다. 그의 판단과 달리, 문인들이 ‘시민’으로서 정치적 의사표시를 할 수 있다는 점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물어야 할 것은 문인들의 정치 참여가 ‘충분히 정치적이었는가’의 문제이며, 이번 논란은 그 대답이 ‘아니요’에 가깝기 때문에 불거진 것이다. 예컨대 “젊은 문인”들이 만들었다고 소개된 문재인 후보 홍보 웹사이트 ‘문카운트’(http://www.5959uzuzu.com)는 그 기묘한 주소가 예고하듯 “미담폭포수, 파도 파도 미담만 나와”라는 식의 ‘문비어천가’로 가득 채워졌으며,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는 문인들의 카드뉴스는 문재인 후보를 지지해야 하는 정치적·합리적 근거 대신 “그가 살아온 내력의 맑고 투명한 아름다움”과 같은 모호한 품성론 등으로 일관했다. 그뿐인가. 인기 트위터리언으로 유명한 한 작가는 타 후보에 대한 네거티브 공세에 가담하거나, 자신에게 반대의사를 표한 트위터 유저들을 고발하겠다는 경고를 남발했다. ‘소신투표’ 행위를 정권교체에 대한 ‘무임승차’나 ‘문재인 대통령 흔들기’로 폄하하는 발언도 거듭했다. 이 과정에서 왜 ‘정권교체’만이 답인지, 왜 어떤 정치적 선택은 “나중에” 해야 되는 것인지에 대한 정치적 대화 및 토론은 찾아볼 수 없었다. 과연 ‘문학의 이름으로’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유명 문인이 특정 후보의 이미지메이커가 되는 것? 미사여구를 동원해 특정 후보를 찬양하는 것? 문학계의 이해관계를 유력한 정치변수로 기입하는 것? 그럴 리가. 문학의 이름으로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문학’이라는 담론양식을 통해 수행해온 지적·예술적 통찰을 우리의 사회적·정치적 상상에 기입한다는 뜻이다. ‘문학의 정치성’을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전(前)정치적·반정치적·탈정치적 수사와 (비)논리로 일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현재 한국 문학계가 빠진 수렁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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