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준 높은 민주국가들을 관찰해보면 정권이 좌우로 교대해도 사회운영의 기본골격이 바뀌는 일은 거의 없다. 새 정부의 인권정책은 ‘진보적’ 조치라기보다, 정상국가를 위한 공공정치의 토대를 다지려는 노력으로 이해해야 더 정확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논란이 되는 이슈는 그것이 노동이든,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든, 성소수자든, 북한인권이든, 국제인권기준과 권고에 따라 정면돌파하면 그만이다.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했고, 유엔인권이사회 의장국을 역임했으며,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의 고위관료 출신을 외교장관으로 지명한 나라에서 무엇을 주저하는가.
지난 주말 외국의 친구들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한국의 새 정부가 인권을 획기적으로 개선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축하한다, 이런 내용이었다. 국내 소식이 그렇게 빨리 바깥에 알려지는 것이 놀라웠고, 그런 칭찬을 듣는 게 생소하기까지 했다. 국가브랜드니 국격이니 하는 말을 달고 살았던 시절 과연 우리의 이미지가 좋아졌고 국격이 올라갔던가. 한 나라의 품격 또는 대외적 평판은 인위적인 마케팅이나 우스꽝스러운 의전과 허세로 높일 수 없다. 그 나라 사람들이 누리는 삶의 격의 합계가 곧 국격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말한 인권국가는 제대로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의 존엄을 한 단계 높일 비전이 될 것이다.
앞으론 국가인권위원회의 대통령 특별보고가 부활하고, 인권위의 지적을 받은 정부기관들은 권고 수용률을 높여야 한다. 인권위 권고의 수용지수를 기관평가에 반영할 모양이다. 공무원들 사이에 갑자기 인권 공부 열풍이 불지도 모르겠다. 인권위의 헌법기구화, 군인권 보호관제 신설, 인권교육법과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인권교육원 설립도 함께 이루어지면 좋겠다. 경찰의 인권보호 기능도 더욱 강조될 것이다. 대통령 부인이 군의문사 유가족을 위한 치유연극을 관람했다는 보도까지 접하니 세상 변화의 속도 앞에 만감이 교차한다.
인권을 국가경영의 핵심가치로 삼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이 질문은 인권과 정치의 바람직한 관계 설정이라는 더 깊은 질문으로 이어진다. 진보적인 정부가 들어서면 분위기가 좀 나아지다 보수정부가 집권하면 쑥 들어가 버려도 괜찮은 게 인권인가. 한국에서 인권은 진보 쪽에서 흔히 주장하는 가치로 알려져 있다. 인간의 사회적 고통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에서 인권이 ‘진보적’인 건 맞다. 그러나 인권의 진보적 성격은 보편적인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고, 불편부당한 방식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따라서 인권을 진보진영만의 전유물로 보아선 곤란하며 진영논리로 재단해서도 안 된다.
인권은 ‘정상적’ 현대 민주국가의 인프라를 구성하는 기본 중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사상과 정견을 떠나 대다수가 합의하는 정치의 밑절미를 이루는 원칙이어야 하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의 12가지 이념>을 쓴 폴 슈메이커는 이를 ‘다원적 공공정치’ 개념으로 설명한다. 자신이 신봉하는 이념을 넘어서 적어도 이것에는 모두가 동의해야 민주국가로 불릴 수 있는 어떤 토대적 전제를 뜻한다.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중, 기회균등, 생각과 마음의 자유, 법의 지배, 민주적 권리가 그것이다. 인권이 바로 이런 토대다. 박권일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람 귀한 줄 아는 나라’를 만드는 일이다.
인권은 의복에 비유할 수 있다. 옷은 바깥에 드러나는 겉감과 살갗에 닿는 안감으로 이루어진다. 정치에서 겉감은 진보와 보수 등 다양한 이념과 정치적 입장을 나타낸다. 그런데 바깥의 겉감과 상관없이 모든 옷의 안감은 공공정치 원리로 만들어져야 한다. 제대로 된 정치라면 진보와 보수가 다 함께 인권과 같은 안감을 공통적으로 갖춰야 한다는 뜻이다. 지난 보수정부는 겉으로 보여줬던 겉감이 무엇이었든 간에 안감으로서의 공공정치를 엉망으로 헤집어 대통령 탄핵까지 자초하지 않았던가.
수준 높은 민주국가들을 관찰해보면 정권이 좌우로 교대해도 사회운영의 기본골격이 바뀌는 일은 거의 없다. 이미 확립된 인권원칙을 철저히 준수하는 보수와, 새로운 인권문제의 경계를 넓혀가는 진보가 공존하는 나라가 ‘정상화된’ 민주국가다. 이 점에 비추어 한국의 보수정당을 평가하면 바른정당은 공공정치형 보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으나, 자유한국당은 공공정치의 본령을 찾기 어려운 옹색한 존재로 전락한 것 같다. 아무튼 새 정부의 인권정책은 ‘진보적’ 조치라기보다, 정상국가를 위한 공공정치의 토대를 다지려는 노력으로 이해해야 더 정확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실 있는 인권국가가 되려면 모든 영역에 인권적 사고와 실천이 스며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교육부가 대학평가를 할 때 인권 가치를 가르치는 교과목이 얼마나 편성되어 있는지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인권은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공통분모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장애인을 위해 지하철 역사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면 노인과 유모차 어머니도 함께 편리해진다. 구치소 조건이 개선되면 일반 형사범만이 아니라 박근혜나 이재용 같은 사람도 혜택을 받는다.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반대하는 시선은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사회인식의 변화와 연결될 수 있다.
인권국가를 지향하는 것은 반갑지만 어떤 기준으로 인권을 규정하고 인권의 범위를 다룰지 논란이 있을 수 있다. 헌법상 기본권에다 국제인권기준을 합친 것이라 보면 된다. 알다시피 대한민국 헌법 6조는, 헌법에 의해 체결·공포된 조약과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규는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고 선언한다. 인권은 원래 성격상 국내인권과 국제인권 사이의 벽이 낮으면 낮을수록 좋다. 국내인권의 잣대를 국제기준에 맞추고 그 기준을 적극 활용하면 된다. 논란이 되는 이슈는 그것이 노동이든,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든, 성소수자든, 북한인권이든, 국제인권기준과 권고에 따라 정면돌파하면 그만이다.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했고, 유엔인권이사회 의장국을 역임했으며,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의 고위관료 출신을 외교장관으로 지명한 나라에서 무엇을 주저하는가.
한국의 법체계에서 국제인권법을 무시해온 역사가 심각한 사법 적폐에 해당한다는 비판도 경청해야 한다. 이것과 관련해 변호사시험의 문제를 지적해야 하겠다. 변호사법 1조를 보라. “변호사는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함을 사명으로 한다.” 이에 따르면 모든 변호사는 당연히 인권변호사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변호사시험에는 인권 과목이 없다. 우리나라 법학 교육은 변호사시험에 의해 결정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험에 안 나오는 과목은 로스쿨에서부터 잘 가르치지 않는다. 인권 옹호가 변호사의 사명이라 해놓고선 시험도 치지 않고 학교에서 가르치지도 않는 현실, 이 얼마나 모순인가. 한국 사법부는 국제인권법을 판결에서 적극적으로 인용해야 하고, 모든 로스쿨에서 국제인권법을 가르쳐야 하며, 변호사시험에 인권 과목이 포함되어야 한다.
새 정부의 인권정책에서 인권과 지속가능발전 목표(SDG)와의 적극적인 연결고리가 보이지 않는 점은 아쉽다. 이미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환경부의 지속가능발전위원회와 총리실의 녹색성장위원회를 합쳐서 대통령 직속 ‘지속가능위원회’로 격상하고, 이 위원회가 유엔의 지속가능발전 목표에 기반한 2030 국가지속가능 목표를 설정하기로 했으니 말이다. 탈원전, 친환경 미래에너지, 신기후체제, 생태계 보전, 4대강 재자연화 등이 눈에 띄는 부분이다. 그러나 지속가능발전 목표는 환경·생태 영역에만 국한된 건 아니다. 빈곤, 교육, 성평등, 불평등, 도시, 인권과 평화 등 총체적 인간발전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21세기형 인권국가의 꿈은 국가지속가능 목표를 달성하는 꿈과 ‘동상동몽’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인권국가를 표방할 때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언행일치에 따르는 부담이 그것이다. 인권의 대의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에게 높은 인권기준을 들이대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인권의 대의를 찬동하는 사람에 대한 기대치와 평가기준은 전혀 달라진다. 이들은 평균점수가 높다 해도 언행에 약간만 문제가 있어도 더 엄격한 기준으로 비판받는다. 인권의 탈을 쓴 위선자 또는 이중 기준이라는 지탄을 받기도 한다. 인권에서는 개인의 행동에서부터 강대국의 외교에 이르기까지 위선의 문제가 특히 심각한 쟁점이 되곤 한다. 내가 ‘주창자의 딜레마’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대의를 자임하는 사람이 짊어져야 할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억울하다고 하소연할 수도 없다. 이왕 인권국가를 내세웠으니 최선을 다한 후 국민의 공정한 평가를 받겠다는 자세를 유지하는 게 정도가 아닐까 한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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