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발장은행장, ‘소박한 자유인’ 발기인 분단, 그리고 전쟁 때문이었다. 우리가 1945년 해방과 함께 새로 건설할 나라의 아이들에게 어떤 교육을 펼칠 것인지를 놓고 교육자, 학부모, 학자와 정치인 등 전 사회 구성원이 참여하는 토론의 장을 갖지 못한 것은. “교육은 백년지계”라는 말이 회자되는 것에 비해, 새 학교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학습 내용과 방식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등에 대해 심층적인 토론이 있었어야 마땅했다. 각 나라의 민주주의의 성숙 정도가 ‘민의 성숙’ 정도, ‘민주의식의 성숙’ 정도에 따라 규정된다고 할 때, 여기에 학교교육만큼 막중한 영향을 미치는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단과 전쟁은 식민지에서 막 벗어난 사회 구성원들로 하여금 이 중대한 주제와 만날 기회를 없애버렸다. 그리하여, 일제부역세력을 청산하지 못했듯이, 일제강점기의 학교 구조와 교육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게 되었고, 이에 대한 문제의식조차 찾기 어려울 만큼 익숙해져 버렸다. 가령 우리 학교의 원형이 군사학교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는 교사와 학부모, 학생이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는 익숙해지는 것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좋은 대상에 익숙해지면 권태나 싫증을 느끼고, 나쁜 제도에 익숙해지면 별 저항 없이 더 나쁜 제도를 받아들이게 되며, 우리를 둘러싼 공간에 익숙해지면 그 공간에 대한 판단력을 잃게 된다. 갑오개혁과 함께 이 땅에 최초의 소학교가 서울 북촌에 세워진 뒤, 고종에 의해 ‘소학교령’이 반포된 게 1895년의 일이다. 근대식 학교의 공식적인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데, 그 5년 뒤인 1900년에 이 땅 최초의 관립중학교가 역시 북촌에 세워졌다. 그 5년 뒤에 을사늑약이 있었고, 다시 또 5년 뒤에 조선이 망했다. 그리고 35년 동안 일제 강점기가 지속됐다. 요컨대, 우리가 별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학교의 기본 틀이 군국주의 일제 강점기 때 정착됐다는 뜻이다. 학교의 교실과 운동장 사이에 권위의 구조물처럼 우뚝 서 있는 구령대가 군사학교의 사열대라면, 학생들이 도열하는 운동장은 연병장이고, 경비실은 위병소다. 이런 학교는 ‘군국주의 일본’의 학교이지, 민주공화국의 학교가 될 수 없다. 우리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공교육의 일차적 소명은 대한민국의 국민을 민주공화국의 구성원으로 형성하는 데 있다. 이 소명에 맞게 학교가 제도와 구조, 학습 방식에 이르기까지 완벽하게 달라졌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분단과 전쟁으로 시기를 놓치면서 70여년의 세월을 흘려보냈다. 실로 뒤늦게 일제부역에 뿌리를 둔 수구세력이 박근혜 정권의 속살을 드러냄과 함께 약해지면서 탄생한 문재인 정권을 맞아 ‘민주공화국의 학교’ 건설을 제기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구령대를 허무는 일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신설 학교는 구령대를 없애고 만들기도 하지만, 여전히 많은 학교에 구령대가 남아 있다. 그래서 구령대를 허무는 일은 학교를 민주적인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첫걸음이다. 민주공화국의 학교는 민주시민을 길러내는 곳이지 신민이나 사병을 양성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며, 학생들이 민주적인 공간에 있을 때 민주주의를 ‘습’(習: 익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사회, 학생회를 법제화하여 학교 운영의 의사결정 주체가 되도록 해야 한다. 학생, 교사, 학부모가 교육의 세 주체라면, 이 세 주체가 학교 운영상 주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교장이 누구인가에 따라 학교가 달라진다는 것은 그만큼 비민주성의 반영이므로 교장임용제도는 없애야 한다. 이렇게 민주공화국으로 규정된 나라의 학교와 교실에서 일제 강점기 때 자리 잡은 전체주의의 유제를 하나하나 없애야 하는데, 이들 중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과제는 주입식 암기교육의 학습 방식을 글쓰기와 토론으로 바꾸는 일이다. 인간과 사회에 관한 공부에서 학생 각자가 ‘나’의 생각을 논리에 바탕을 두고 고민하고 정리하고 피력하는 과정으로 필수적인 게 글쓰기와 토론이다. 이 두 가지가 빠져 있다면 인문사회과학 공부를 한다고 말할 수 없다. 학생들에게 사유하도록 하지 않고 논리를 갖추도록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심각한 문제는 또 있다. 사유하지 않았다면 의식세계가 비어 있는 편이 차라리 나은데, 사유하지 않았는데도 의식세계는 충만하다. 주입된 것이 많기 때문이다. 학생에게 암기하도록 요구되는 내용이 ‘객관적 진리로 포장된 지배세력의 관점 또는 지배이념’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자신의 처지나 정체성과 동떨어진 의식세계를 갖고 그것을 고집하는 서글픈 존재들이 양산되는 배경이다. 여기서 글쓰기와 토론이 주입식 암기교육과 어떻게 다른지 좀 더 살펴보자. 글은 누가 쓰나? 학생 각자가 쓴다. 토론은 누가 하나? 학생 각자가 참여한다. 글쓰기와 토론에는 ‘나’가 있다. 교실에서 학생 각자가 글쓰기를 하고 토론에 참여하는 일상 자체가 주체화의 과정인 데 반해, 받아쓰고 숙지하는 과정은 대상화다. 모든 학생에게 똑같은 내용을 주입하는 과정에 ‘나’는 없는데, ‘나’ 없이 인간과 사회에 관한 학문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전체주의 사회에서의 일이다. ‘나’에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고, 성소수자도 있고, 이주노동자의 아이도 있고, 가난한 사람, 부자인 사람, 농촌 사람, 도시 사람, 섬사람도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나’들이 각자의 처지와 정체성을 바탕으로 인간과 사회에 관한 물음에 자신의 생각과 논리를 가져야 하고 견해를 피력해야 하는데, ‘나’가 없다면 다시금 강조하건대 인문사회과학이라고 할 수 없다. 토론수업을 강조하는 혁신학교의 지향은 백번 옳다. 그러나 아직 부족하다. 글쓰기와 토론이 인문사회과학 공부의 일상이 되어야 하는데 아직은 양념처럼 곁들이는 정도에 머물고 있어서다. 결국 우리는 대학서열체제에 대해 엄중히 숙고해야 한다. 실제로 교육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회 구성원들은 거의 대학서열체제가 문제의 핵심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 문제가 극복되기 어려운 것은 대학서열체제가 전체주의적 주입식 암기교육과 찰떡궁합의 관계를 맺고 있어서다. 글쓰기와 토론을 통해서는 대학서열체제가 요구하는 학생 줄세우기가 어려운 반면, 암기교육으로는 아주 수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문사회과학은 애당초 학생을 줄 세울 수 있는 학문이 아니다. 줄 세우기 위해 학문을 왜곡하고 있을 뿐. 실상 대학서열체제는 적잖은 교육자, 교사의 불성실에 방패막이가 되어준다. “문제를 알고 있지만 대학서열체제가 바뀌지 않는 한 다른 도리가 없다” “학교 현실을 알지 못하는 이상론이다” 등의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학문을 왜곡하는 행위를, 그것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실에서 계속 행할 것인가. 그렇다면, 다음 악순환의 고리는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제도적 굴레인 대학서열체제는 학생들에게 줄 서기를 요구함으로써 교육 주체들에게 주입식 암기교육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강제한다. - 이 주입식 암기교육은 비판적 안목을 갖지 못하게 한다. - 비판의식을 갖지 못한 사회 구성원들은 대학서열체제와 같은 차별체제에 맞서는 대신 복종한다.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많은 사회 구성원들이 능력만 되면 한국을 떠나려 한다는 것을. 그 대부분이 자녀 교육 문제 때문이라는 것을. 그만큼 교육의 세 주체가 모두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여기에 학문까지 왜곡되고 있다고 덧붙여야 할 것이다. 민주공화국 학교 건설이 문재인 정부에서 중요한 과제로 인식되기 바란다.
연재홍세화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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