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한성렬 북한 외무성 부상이 평양에서 (AP) 통신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평양/AP 연합뉴스
20여년 전 해켄색의 식당 주인에게 매달리던 한성렬과 북한의 절박함을 미국이 잘 대처했다면, 현재의 상황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북한은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을뿐이다.
“미국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요?” “도널드 트럼프!”
로버트 이건과 체육관에서 운동하던 한성렬 당시 유엔주재 북한 차석대사는 주저없이 대답했다. 질문을 한 이건 역시 한 대사의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차를 같이 타고 돌아다니며 트럼프에 대해 얘기하곤 했다. 당시는 트럼프의 전성기였다. 그들의 차가 지나던 뉴욕 시내의 트럼프타워를 비롯해 맨해튼에서 애틀랜틱시티까지 거대한 트럼프 빌딩들이 세워져있었다.
1998년 초였다. 당시 북한은 ’고난의 행군’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가난하고 고립무원의 나라에서 온 외교관에게 트럼프는 경외의 대상이 분명했다.
미국 뉴저지 해켄색에서 바비큐 식당 ’커비스’를 운영하는 로버트 이건이 2010년 <적과의 식사>라는 책을 출간했다. 평범한 미국인 이건과 최고 적성국가 북한의 외교관인 한성렬의 친분, 그리고 미국과 북한의 접촉을 중개하려는 그의 노력을 담은 책은 당시 언론에도 소개되며 자그만 화제가 됐다.
한성렬 차석대사가 먼저 1993년에 이건을 찾아왔다.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고 본격적으로 북핵 위기가 시작될 때였다.
해켄색의 건달로 성장했지만 애국주의 성향을 가진 이건은 베트남에 억류된 미군 포로 석방에 관여했고, 그 과정에서 베트남 외교관의 미국 망명도 도왔다. 한 대사가 이건을 찾은 것은 미국과의 관계 구축에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북한의 절실함을 보여줬다.
두 사람은 곧 의기상통했다. “서로의 서민적 정서 때문에 우리는 호흡이 잘 맞았다. 나는 북한 외교관들을 ’블루컬러(노동자) 외교관’이라 불렀고, 그들은 나를 ’바비큐 외교관’이라 불렀다.”
이건은 한 대사 등 북한 외교관들의 미국 생활에 도움을 줬다. 낚시와 운동을 같이했다. 이건은 펜실베이니아 주 상원의원을 데리고 북한을 방문하는 등 모두 4차례나 방북하며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 사업을 모색했다.
2001년 출범한 조지 부시 미 행정부는 북한을 압박하며 군사적 침공을 을러댔다. 한 대사는 이건이 주선한 <뉴욕타임스>의 기자 필립 세넌과의 인터뷰를 통해 미국과의 대화 재개에 성공하기도 했다. 한 대사는 2002년 인터뷰에서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할 수 있다’고 밝혀, 가느다란 미-북 대화 통로를 열었다. 이는 부시 행정부 말기에 미-북 평화협정 논의까지 진전되기도 했다.
연방수사국(FBI)도 두 사람의 관계를 이용해 북한 외교관의 인체정보를 수집하기도 했다. 북한은 모른척하고 이건과의 관계를 유지했다.
한성렬은 이제 외무성 부상이고, 사실상 북한의 외교를 지휘한다. 미국에서 트럼프를 가장 존경한다는 그는 지난 4월14일 <에이피>(A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트럼프는 항상 공격적인 단어로 도발을 해 온다”고 비난했다. 북한이 핵를 포기할 수 있다던 그는 “우리는 이미 강력한 핵 억지력을 보유하고 있고 미국이 선제공격을 가할 경우 팔짱만 끼고 보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며 “선제공격으로 대응한다”고 말했다.
20여년이 지났다. 이제 트럼프는 더이상 한성렬이 존경하는 인물이 아니고, 북한이 포기할 수 있다던 핵은 미국을 위협하는 북한의 억지력 무기로 바뀌었나?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20여년 전 해켄색의 식당주인에게 매달리던 한성렬과 북한의 절박함을 미국이 잘 대처했다면, 현재의 상황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북한은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을뿐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북한에게 최대의 압박을 가하지만, 최대의 관여도 표방하고 있다. 그리고 ’김정은과 햄버거를 놓고 대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를 존경한다는 한성렬의 말은 진심이고, 지금도 그럴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표방하는 한반도 문제의 주도권에는 미-북 대화에서 한국의 촉매 역할도 포함된다. 해켄색 커비스 식당의 바비큐 햄버거가 미-북 대화의 테이블에 놓일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글은 2000년대에 제일기획의 뉴욕 주재원으로 일하다 커비스 식당을 애용했던 박재항 마켓팅 컨설턴트의 도움으로 작성됐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이건의 책을 다시 읽은 그는 자신이 겪었던 이건과의 일화를 전해줬다. 그의 블로그(http://blog.naver.com/jaehangpark)도 참고가 됐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