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자 정부의 군사당국회담 및 적십자회담 제안에 대해 북한이 며칠째 침묵하고 있다. 북쪽 나름의 고민이 느껴진다. 앞서 북쪽 관영 언론을 대표하는 <노동신문>은 이번 제안의 바탕인 문재인 대통령의 ‘베를린 구상’에 대체로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남쪽이 그렇듯이 북쪽도 남북 관계를 두고 전술적·전략적 판단을 한다. 실익을 챙기고 대내외 명분을 강화하는 게 전술적 측면의 판단 기준이라면, 전략적 판단은 근본적인 목표에 관련된다. 베를린 구상은 우리 목표를 한반도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 남북 경제공동체 건설 등으로 요약했다. 반면 김정은 북한 정권은 체제 유지와 발전을 위해 핵·경제 병진 노선을 내세운다. 전술적 측면에서 남북 관계 개선의 이점은 상당히 분명하다. 군사당국회담에서 ‘군사분계선에서 일체의 적대행위 중지’에 합의한다면 양쪽 모두에게 이롭다. 적십자회담을 통해 이산가족 상봉이 성사될 경우엔 대북 인도적 지원이 재개될 가능성이 커진다. 전략적 측면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는 목표 차이에서 비롯되지만, 북한이 현실에 어긋나는 그릇된 판단을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장 눈에 띄는 게 핵·미사일 역량 강화와 관련된 북한 태도다. 노동신문 논평은 “정밀화하고 다종화한 우리의 자위적 핵 무장력은 세계 정치 지형에 커다란 지각변동을 가져오고 있으며, 오늘날 한반도 평화 보장의 조건과 가능성도, 평화협정 체결의 환경도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을 괴롭더라도 (관련국이)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과대망상에 가깝다. 북한이 아무리 핵 역량을 키우더라도 동북아에서 약소국일 뿐이다. 핵 보유는 지구촌의 경계심만 키울 뿐 세계 정치 지형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물론 관련국들이 핵 문제를 자신의 노선 강화에 활용한다면 동북아 정치·안보 지형이 어느 정도 바뀔 수는 있다. 핵 보유는 단기적으로 북한 체제 유지에 기여하더라도 더 큰 고립을 불러 경제에 족쇄로 작용한다. 평화체제 구축의 이익은 핵 보유의 비용을 훨씬 뛰어넘는다. 남쪽이 외세의 힘을 빌려 흡수통일을 꾀하는 것으로 보는 것 또한 북한의 전략적 판단을 그르친다. 베를린 구상은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을 견지하며 북한 붕괴나 흡수통일, 인위적 통일을 추구하지 않을 것을 공언했다. 큰 희생을 감수하고 압도적 군사력을 동원하지 않는 한 흡수통일은 불가능하다. 북한이 말하는 흡수통일론은 자신의 국제 위상 약화를 반영하는 불안감의 표현이거나 망상이 만들어낸 논리다. 북쪽은 남북 사이 비정치적 교류·협력 진전보다 근본 문제인 정치·군사적 대결 상태 해소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지만 현실화하려면 남북 당국이 중심적 구실을 해야 한다. 하지만 북한의 실제 움직임은 그렇지가 못하다. 남북 당국과 정당·단체, 나라 안팎의 동포들이 함께 참가하는 통일대회합을 개최하자는 제안이 그 사례다. 이는 근본 문제를 풀려는 자세도, 6·15 선언과 10·4 선언을 유지·발전시키려는 모습도 아니다. 북한은 모순되고 지속가능하지 않은 기존 노선을 고수할지, 아니면 새 전략적 선택을 해야 할지 갈림길에 있다. 지금 변화의 실마리를 만들어내는 것은 문재인 정부다. 곧 우리 정부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북한의 태도가 달라질 수 있다. 당장 필요한 것은 신뢰 구축이다. 단기간에 성과가 나지 않더라도 공식·비공식의 다양한 채널을 확보해야 한다. 베를린 구상을 비롯한 정부 제안이 진심이라는 점을 북한이 믿게 해야 한다. 대북 대화와 제재 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정교한 계획이 요구된다. 남북 관계 진전은 핵 문제를 풀려는 노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해야 하며, 핵 협상이 시작된다면 대북 제재에 일정한 수정이 불가피하다. 따라서 대화와 제재를 병행하면서도 양쪽의 균형을 맞춰가야 한다. 문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에서 밝힌 ‘한국의 주도적 역할’은 시종일관 필수다. 대북 제재 동력이 떨어질까봐 남북 대화에 소극적인 미국도 잘 설득해야 한다. 과거 정부에서 핵 문제와 남북 관계를 풀려고 최전선에서 애썼던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과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회고록의 제목을 <빙하는 움직인다>와 <칼날 위의 평화>라고 했다. 칼날 위에서 빙하가 움직이도록 만들면서 평화를 만들어가야 하는 엄중한 현실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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