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부 선임기자 북한이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미사일을 쏘아대는 요즘 북한의 핵을 용인하거나 주한미군 철수를 얘기하면 당장 ‘종북’이라고 딱지가 붙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얘기는 미국에서, 그것도 미국 안보와 국방을 주도한 현실주의 주류 진영이 그 근원이다. 먼저 로버트 게이츠 전 국방장관이다. 지난 27년 동안 공화·민주 7개 행정부에서 정보·국방 고위 관리로 일한 그는 미국의 표준적이고 주류적인 안보·국방관을 대표하는 이다. 그는 지난 11일치 <월스트리트 저널>에 자신을 인터뷰한 한 칼럼니스트의 글을 통해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며 북한 체제 인정과 체제 교체 포기, 북한과의 평화협정, 한국 내 군사력 구조 변화를 제안했다. 한국 내 군사력 구조 변화란 한-미 합동훈련 및 주한미군 주둔 변화를 말한다. 그는 더 나아가 북한에 10~20개의 핵무기 보유를 보장하는 조건으로 더이상의 핵무기나 운반 능력을 개발하지 않는 정밀사찰을 제시했다. 그는 이런 제안들을 중국에 내밀어, 중국이 북한에 관철하지 못하면 아시아에서 중국을 압박하는 전면적인 군사력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으로는 버락 오바마 전 행정부에서 국가정보국장을 지낸 제임스 클래퍼이다. 그는 16개 미국 정보기관을 총괄하는 국가정보국장으로 재직하던 2016년 10월25일 외교위원회(CFR) 연설에서 “북한의 비핵화는 불가능하다. 최선은 (북한의 핵능력을) 제한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 발언에 앞서 그해 5월 한국을 방문해 미국이 북한과 평화협정을 체결할 경우 한국이 얼마나 양보할 수 있는가를 타진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는 지난 6월말 한국에서 열린 포럼 인터뷰에서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은 불가능하다며, 평양에 미국의 이익대표부 개설을 시작으로 평화협정 체결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요지는 북한 핵을 현실로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북한과의 관계를 재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도 트럼프 행정부 출범 전인 지난해부터 북한 핵을 인정한 상태에서 현실적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북한 핵과 관련해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피해를 제한하는 게 전부”라며 북한 핵 전문가인 시그프리트 헤커 박사의 ‘3노(No)’ 제안으로 협상을 제안했다. 즉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도록 하는 건 이미 너무 늦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핵물질 추가생산 금지, 핵 성능 향상 금지, 기술이전 금지에 초점을 맞추자는 것이다. 미국의 지난 정부에서 북핵 문제를 다뤘던 국방안보 책임자들 사이에서는 이제 북핵 해결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미국은 그동안 북한 핵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고, 불가역적인 폐기’(CVID)를 공식 추진했으나, 이제는 북한이 핵과 미사일 능력을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고, 불가역적인 개발’(CVID)을 하는 단계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핵과 미사일을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고, 불가역적으로 개발한 뒤에야 협상에 나설 것이다. 우려되는 것은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하는 중국을 통한 북핵 해결책이 한반도와 동북아를 사이에 둔 미-중 간의 패권 다툼이나 나눠먹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게이츠 전 장관의 북핵 용인 주장도 기본적으로 중국에 대한 제안이다. 한반도 북쪽에 대한 중국의 영향권을 전적으로 인정해주거나, 아니면 한반도를 핵심으로 한 아시아에서 중국과의 전면적 대결을 불사하겠다는 것이다. 미국 현실주의 외교의 대부 헨리 키신저도 30일치 <뉴욕 타임스>에 북한 붕괴 뒤 한반도에서 미군 철수를 중국에 약속해 중국의 우려를 달래자는 주장을 했다. 그는 “만약 우리가 북한 정권 체제 붕괴 뒤에 올 것을 중국과 먼저 합의한다면, 북한 핵문제를 해결할 더 좋은 기회를 갖게 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제안을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에게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우리가 여전히 북핵과 북한을 놓고 종북이니 용공이니 하는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동안, 미국과 중국은 북핵을 용인하는 것을 놓고 한반도를 다시 요리하려 한다.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현실을 타개할 답을 찾지 못하고, 현실을 추종하고서는 현실을 극복할 수 없다. 북핵 위기를 기회로 바꾸려면, 한국이 앞서는 대담하고 창조적인 접근이 절체절명으로 필요한 순간이다.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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