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수
논설위원실장
다시, 격돌의 시작이다.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의 국회 인준 부결은, 박근혜 정권 몰락 이후 한동안 뜸했던 보수세력의 ‘이념공세’가 본격화했음을 뜻한다. 김이수 인준이 부결되자 자유한국당 의석에선 환호성이 터졌다. 국회뿐 아니다. 보수신문의 기사와 사설엔 “사법부 코드 인사에 대한 준엄한 경고”라는 식의 제목이 달렸다. 국정 파탄의 책임을 진 황교안 전 국무총리는 뻔뻔하게도 “통진당을 되살리려는 시도엔 온 국민과 함께 단호하게 대처해 나가겠다”고 페이스북에 썼다. 황 전 총리 말처럼, 김이수 후보자에게 덧씌워진 혐의는 ‘통합진보당 해산에 반대한 좌파 이념의 소유자’라는 것이었다.
김이수 후보자 인준이 부결된 뒤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 후보자가 옹호한 건 통합진보당이 아니라, 정당활동과 정치결사의 자유였다. 김 후보자는 헌재 소수의견에서 “이석기 의원 등이 국가 기간시설을 공격한다는 발상과 주장은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된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런데 그걸 ‘통진당 내 지하혁명조직 옹호’로 둔갑시켜 비난했다. 민주주의의 기본인 ‘정치결사의 자유’를 지지한 걸 두고, “종북 정당 해산에 반대한 사람이 헌재소장이 될 수 있는가”라는 전혀 엉뚱한 지적으로 치환해 본질을 호도했다. 그게 바로 색깔론이고 매카시즘이다.
박근혜·이명박 시절의 반지성적 블랙리스트 진실을 들춰내는 한켠에선, 이렇게 시대착오적 매카시즘이 부활하고 있다. 박근혜 정권이 무너진 지 불과 몇달 만에 이 땅의 보수세력은 흑백논리와 이념전쟁이란 낡은 칼을 손에 쥐고 다시 전선에 뛰어들었다. 칼날은 양심적 병역거부와 성소수자 인권에서 전향적 태도를 취한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에게 향한다. 야당은 ‘정당한 견제’를 말하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건 정권을 흔들려는 ‘정치적 야욕’이다.
결국 칼날이 겨누는 건 문재인 정권 그 자체다. 과거 정권에서 정치적 인연에 의한 발탁을 뜻했던 ‘코드 인사’란 단어는 이젠 ‘이념적 코드의 확산’을 뜻하는 말로 활용된다. 최근 보수언론의 문재인 정권 분석 기사에서 ‘1980년대 운동권 출신이 청와대와 정부 요직을 장악했다’는 주장이 눈에 띄게 늘어난 건 우연이 아니다. ‘이념적 코드’의 원천이 1980년대 운동권 가치와 문화라는 프레임을 공개적으로 확산시키는 것이다. 새로운 보수를 주창하며 박근혜 정권과 결별했던 김용태 의원(바른정당)이 현 정권을 “80년대 운동권의 집단 신념을 구현한다”고 공격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물론, 김이수 후보자가 옹호했던 정치활동의 자유와 소수자 인권의 가치는 1970~80년대 민주화운동의 지향과 일맥상통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직후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희생자 가족을 진심으로 껴안았을 때, 북한의 냉랭한 반응에도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을 때, 그걸 보면서 현 정권이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나는 느낀다. 그런데 그게 잘못인가. 그 시절 ‘운동권’은 정치적 민주화를 위해 싸웠고, 소수자와 소외받는 사람들의 권리 회복을 위해 고난을 감수했다. 광주에서 수백명의 무고한 시민을 살육하고 등장한 군부독재정권에 맞서 싸웠던 시대의 가치를 계승하는 게 지금 왜 문제가 되는가. 이 가치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 시절에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던 걸까.
1980년대 민주화운동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투쟁이었다. 수십년이 흘렀지만 그걸 계승하는 건 ‘편향’이 아니다. 우리 현대사의 비뚤어진 ‘정통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이걸 한쪽에 치우친 ‘코드’라고 비난하는 건, 해방 직후 반민특위 활동을 ‘편협한 공산주의자들의 분열 책동’으로 몰았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반파시즘 운동을 추모하고 나치의 아우슈비츠 학살을 기억하는 미국과 서구의 전통은 뭐라고 부를 것인가.
시간이 지나도 지켜야 할 가치는 있다. 운동권이 지향했던 민주주의와 인권, 평등의 가치는 여전히 소중하다. 능력과 도덕성, 행태의 문제를 질타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가치를 지향하는 이를 기용하려는 걸 ‘독선’과 ‘오만’이라 비난하는 건 지나치다. 사람과 사회를 보는 시각의 편협함이 80년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건 보수를 자칭하는 바로 그들이다. 퇴행에 편승하는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후예들’ 역시 안타깝긴 매한가지다. 박근혜의 몰락이 한국 사회의 보수에겐 교훈이 되지 못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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