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
논설위원
2014년 영화 <카트>는 잘 알려졌다시피 이랜드그룹의 홈에버 사태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일방적인 계약해지 통보를 받은 계산대와 청소 업무 여성들이 노조를 만들고 매장 점거 파업을 벌이다 해고된다. 영화에선 이를 지켜만 보던 정규직들이 자신들에게 위기가 닥쳐서야 노조를 결성한다. 실제는 좀 달랐다.
2007년 당시 비정규직보호법 발효를 하루 앞두고 대거 계약해지된 비정규직들과 처음부터 함께한 것은 정규직이던 이랜드 일반노조 지도부였다. 500일 넘는 싸움 끝에 노조 간부 19명이 해고 또는 자진사직 형식으로 물러나는 조건으로 전원 직접고용을 따냈다. 직접고용 대상에 비조합원까지 포함시키는 게 ‘무임승차’라는 비정규직 조합원의 반발도 있었지만, 노조가 눈물을 흘리며 설득했다. 한국 사회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손잡고 절반의 승리라도 거둔 기억은 드물다.
지난 주말 비정규직노동박람회가 열린 서울역 광장에서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상근활동가와 만나 어쩌다 이야기가 10년 전으로 흘렀다. 그는 해고된 이랜드 수석부위원장 출신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노조가 건강했다. 이들의 아픔과 차별을 해소해야 한다는 마음뿐, 정파도, 정규직-비정규직 구분도 없었다.”
착잡해졌다. 10년 전 이야기가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교육부의 비정규직 전환 심사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 깊은 골을 단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나. 전교조는 정규직들의 반발에 기간제 교사에 대한 입장 표명을 포기했다. 사실상 전환 ‘제로’인 결과가 공개되자 다른 공공기관들의 분위기도 바뀐다는 말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이남신씨가 지난주 정의당 주최 토론회에서 “민주노총 주력세대는 쇠퇴한 게 아니라 타락한 것”이라며 전교조와 현대차판매 비정규직의 가입 요구를 외면한 금속노조를 작심하고 비판한 건, 그런 안타까움 때문일 것이다.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까, 아니 풀 수는 있는 걸까. 적어도 두가지는 분명해졌다고 생각한다. 먼저 비정규직 전환은 단번에 풀려 하면 아무것도 안 된다는 사실. 또하나는 고용형태에 따른 일자리 질의 격차가 기형적으로 큰 상황이 바뀌지 않는 한, 위로부터의 강제는 사생결단식 갈등만 키울 뿐이란 점이다. 냉정하게 현실을 보자. 청소나 경비 등 선호도가 높지 않은 직종은 상대적으로 논의가 쉽다. 하지만 교원, 사서, 연구원 연구직 같은 직종의 경우 진입을 위해 수년간 노력한 이들의 기회를 뺏는다는 반발을 잠재울 길이 없다. 채용 비리가 만연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비정규직에 알음알음으로 들어온 이들이 많을 것이란 인식도 상당하다. ‘입직’ 과정 논란이 클 수밖에 없다. 정규직 전환을 서두르는 서울시 산하기관들마다 최근 젊은 정규직 입사자들의 반발이 게시판을 도배하다시피 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정부는 솔직해야 한다. 단기간에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는 환상이다. 단계적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면, 852개 기관의 규모나 예산 여력, 노사 간 신뢰관계, 노노 간 갈등 수준 등을 따져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교육부 전환심사처럼 애매한 가이드라인만 내놓고 당사자들에게 맡겨놓는 건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전교조는 입장을 내고 현장에서 양보를 설득해야 한다. 비정규직 당사자들도 직종에 따라 가산점이나 제한경쟁 등 절차적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의 논의를 무조건 배척하지 않았으면 한다.
구제금융 위기를 계기로 파견근로제와 정리해고제가 도입된 지 20년, 비정규직 문제는 임계치에 와 있다. 그럴수록 깨질지 모르는 유리그릇 다루듯 신중한 로드맵이 필요하다. 지금은 모 아니면 도 식 결론이 아니라 좋은 선례가 절실하다.
do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