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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2030 잠금해제] 무수한 ‘말 걸기’의 역사, ‘아이 캔 스피크’ / 오혜진

등록 2017-10-01 17:42수정 2017-10-01 19:21

오혜진
문화연구자

‘위안부’ 문제를 다룬 짧지 않은 서사의 계보가 있다. 반일감정을 자극하며 가부장적 민족공동체에 호소하기, 보편적인 휴머니즘에 기대 ‘위안부’ 문제를 참혹한 전쟁범죄로 고발하기, 차마 재현될 수 없는 여성의 고통과 피해의 경험을 강조해 후세의 죄책감과 책임의식을 촉구하기…. 나름의 서사적 조건을 반영한 이 서사들은 각각 이전 ‘위안부’ 서사의 정치적·윤리적·미학적 쟁점을 계승·극복하는 방식으로 ‘위안부’ 서사의 계보를 형성해왔다.

그런 면에서 최근 또 하나의 ‘위안부’ 서사로 화제가 된 영화 <아이 캔 스피크>는 의미심장하다. 이 제목은 ‘말한다는 것’이 ‘위안부’ 서사가 지닌 정치성의 강력한 동력이자 서사적 결절점일 수 있음을 깊이 의식하고 있다. 이는 빙의나 신들림, 트라우마나 정신분열 같은 영적·병리적 장치를 통해서만 ‘위안부’에게 (비)언어를 허용하거나 ‘말해질 수 없음’의 방식으로만 고통을 재현해온 주류 ‘위안부’ 서사와 대비된다. 이 영화는 ‘위안부’ 피해자들도 말할 수 있다거나 말해야 한다는 당위를 넘어, 이미 이들이 자신과 이웃, 그가 속한 공동체에 끊임없이 ‘말 걸어’ 왔음을 깨닫게 한다.

영화는 ‘옥분’(나문희)이 가족에게도 수용되지 못하고 국가에서 실시한 ‘위안부’ 등록에도 참여하지 않은 채 사회적 낙인에 시달려왔음을 보여주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녀가 구청장이 다섯 번 바뀌는 동안 무려 8000건의 민원을 제기하며 살아왔다는 건 무슨 뜻일까. 그건 그녀가 생의 의지로 충만한 성실한 시민으로 살아왔다는 것 이상이다. 그녀는 어떻게 이 사회가 보여준 낙인과 냉대에도 불구하고 끝내 “법은 지키는 게 도리”라며 이 나라의 법과 제도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 이 설정은 ‘책임 있는 청취자’가 있어야 ‘위안부’ 피해자들이 말할 수 있다고 강조해온 ‘위안부’ 서사의 명제를 조금 비튼다.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은 그 어떤 조건에서도 늘 이 사회에 ‘말 걸고’ 있었다.

그녀들이 ‘말하는’ 순간을 포착한 대목이 이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건 당연하다. 자신을 보고 등 돌리는 ‘진주댁’을 쫓아가 옥분이 끝내 이웃과의 소통을 이뤄내는 장면, 옥분이 미국 법정에서 “증언하겠습니다”라고 번역되는 “아이 캔 스피크”를 발설하는 장면의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뿐인가. 옥분이 조선어와 영어로 행한 연설은 비록 허구지만, 매우 섬세하고도 신중한 설정이다. 이 영화는 ‘정심’(손숙)이 자신의 증언이 오역된 경험 때문에 직접 영어 연설문을 썼고, 옥분으로 하여금 그 연설을 계승하게 함으로써 ‘제국어에의 의탁’이라는 혐의를 영리하게 피하면서 육체적·정신적으로 쇠약해진 정심 또한 말하는 주체로 기입되게 했다. ‘정심’ 역을 한 손숙이 영화 <귀향>에서는 영매를 통해서만 말할 수 있었던 ‘영옥’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이 얼마나 절묘한가.

조선어, 영어, 일본어, 그리고 비록 가로막히긴 했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통쾌하게 선보이는 보디랭귀지까지. 옥분이 다채롭게 구사하는 언어들은 재현 불가능한 고통을 기록하는 걸 넘어,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이 스스로 역사적 존재이자 한 명의 ‘여성-어른-시민’으로서 자기 생의 의미를 구성하기 위해 시도해온 삶의 방식으로 논의의 초점을 이동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아이 캔 스피크”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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