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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성한용 칼럼] 맹목과 광기로 저무는 ‘박근혜 시대’

등록 2017-10-16 17:40수정 2017-10-16 18:41

성한용
선임기자

화장기 없는 얼굴에 무테 안경을 쓴 박근혜 전 대통령의 모습은 낯설었다. 핀 사이로 삐져나온 머리카락과 목의 점까지 슬퍼 보였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참담하고 비참하다”고 했다. “사사로운 인연을 위해서 대통령의 권한을 남용한 사실이 없다는 진실”이라고 했다. “법치의 이름을 빌린 정치보복”이라고 했다.

입에서 나는 소리가 다 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참담하고 비참한 것은 그가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 모두다. 전직 대통령의 추락보다 봐주기 어려운 것은 그 뻔뻔함이다. 조금도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말대로일 것이다. “저를 믿고 지지해주시는 분들이 있고 언젠가는 반드시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지지자들은 “박근혜 대통령은 무죄”라고 울부짖는 사람들이다. 국회 앞마당에 태극기를 줄지어 꽂아 놓고 “박근혜 대통령”을 연호하는 사람들이다. 경찰과 기자들에게 욕설을 퍼붓는 사람들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몰염치와 지지자들의 과격한 행동은 전직 여성 대통령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마지막 동정심까지 거두어 가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그의 지지자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잘못이 없다고 확신하는 이유는 뭘까?

주말인 14일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 ‘박근혜 대통령 구속 연장 규탄 국민대회’ 집회장을 찾아가 보았다. 쩌렁쩌렁 구호가 울렸다.

“박근혜 대통령을 구출하자 구출하자 구출하자. 문재인을 타도하자 타도하자 타도하자.”

전광판에 ‘국본(國本)의 목표’라는 글씨가 보였다. ‘박근혜 대통령 구출 및 명예회복, 문재인 정권 축출, 종북좌파 완전 처단, 한미동맹 유지 및 공고화, 북한 김정은 정권 괴멸’

조금 떨어진 광화문사거리 동화면세점 앞에서는 ‘태극기 행동본부’의 문화제와 바자가 열렸다. 4인조 색소폰 연주, 바라춤 공연이 흥을 돋웠다. 참석자들의 표정은 밝았지만 메시지는 살벌했다.

“문재인은 헌법이 아니라 촛불 혁명으로 정권을 잡았다. 작년에 광화문에는 ‘문제는 자본주의 답은 사회주의’라는 깃발이 나부꼈다. 지금 대한민국이 사회주의로 가고 있다. 정부 권력기관을 주사파와 운동권이 장악하고 대한민국 체제를 바꾸려 하고 있다. 문재인의 적폐청산은 단순한 정치보복이 아니라 숙청이다. 4차 숙청 대상은 여러분 태극기 부대가 될 것이다.”

비현실적이고 비상식적인 생각이 외계인과 비슷하다. 왜 이렇게 됐을까? 생각을 지배하는 것은 정보다. 이들은 가짜뉴스를 사실로 믿는다. 가짜뉴스는 그들의 대화방에 차고 넘친다.

“민주화는 1948년 7월17일에 완성됐다. 광주 5·18은 무장반란이다. 김영삼의 아이엠에프, 김대중의 카드대란이 나라를 망쳤다. 저들은 민주화 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반정부 행위를 한 것이다.”

최근 대화방에 개성공단 전력공급설이 돌았다. 2016년 2월 중단된 전력공급을 2017년 3월31일 박근혜 대통령 구속 수감 직후 남쪽에서 재개했다는 내용이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트위터에 “한국의 천치(idiot)가 북한의 개성공업단지에 전기를 공급했는데 이것은 유엔의 규정을 완전하게 위반한 것이다”라고 했다는 가짜뉴스를 근거로 만들어진 또 다른 가짜뉴스였다.

사실이 아니라는 통일부 공식 발표와 언론 보도가 있었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 지지자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부 당국은 물론이고 ‘조중동’을 비롯해 모든 언론이 종북좌파의 통제를 받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확신이다.

‘인지 부조화’를 ‘확증편향’으로 해소하는 것이 ‘포스트 트루스’ 시대의 특징이다. 믿음과 사실이 충돌하면 사실을 배격하고 믿음을 지킨다. 이 지경이 된 데는 물론 기존 언론의 잘못도 크다. 진영으로 패가 갈려 싸운 탓이다. 미디어 생태계의 급격한 변화를 깨닫지 못하고 수용자를 가르치려 한 탓이다.

어쨌든 걱정이다. 가짜뉴스로 자신만의 기괴한 세상을 창조해 가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지지자들이 바로 그렇다. 빈부 격차나 정보의 격차, 문화 격차보다 인식의 격차가 훨씬 더 위험하다. 사실에 대한 판단이 아예 다르면 공동체의 운명이 달린 의제를 공론화할 수 없다. 신념이 지나쳐 맹목과 광기로 치닫는 이 사람들을 도대체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

정치팀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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