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인류학자·연세대 명예교수 거울을 도구로 사용하기로 한 ‘요정 언니’는 추석 때 힘들어하는 사촌 동생을 할머니 방에 데리고 가 자신의 손거울을 주면서 요정 언니 노릇을 했다. 그전 같으면 모른 척했을 것인데 자신의 스튜디오가 있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행동하게 되더라고 했다. 얼마 전 ㄱ대학 대나무숲 익명 커뮤니티 게시판에 “학벌주의가 심해졌으면 좋겠어요…. 내가 어떻게 ㄱ대학에 왔는데…”라는 글이 올라와 논란이 벌어진 적이 있다.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쏟은 노력이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는 불공정한 세상을 성토하는 글이었는데 다음과 같은 제안도 있었다. “예를 들면 공무원시험에서 특정 직렬은 어떤 학교 이상 졸업해야 시험을 볼 수 있게 하는 거예요. 안 그러면 공무원은 학벌 세탁의 가장 좋은 수단이 되니까요.” “노력해서 ㄱ대에 왔으니 과거에 노력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좀 덜 대접받아도 되지 않나 싶어요. 저만의 생각인가요?”라는 물음으로 끝낸 이 글에는 2천건에 이르는 댓글이 달렸다. 입시 공부만을 위해 달린 인생을 보상받으려는 심정을 이해하긴 하지만, 유아기적 경험세계를 벗어나지 못한 채 순진한 얼굴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라고 말하는 대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우려스럽다. 대학생들의 또 하나의 특징은 이들이 ‘무임승차’하는 학생을 아주 싫어한다는 점일 것이다. 이제는 팀 프로젝트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 수준에 달했다. 팀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페다고지(배움에 대한) 실험을 해온 나는 궁리 끝에 이번 학기에는 재난학교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문화기획 실습> 수업을 진행했다. 재난 현장이 학교가 되어야 한다며 재난학교를 꾸려온 최소연 테이크아웃 드로잉 아트디렉터와 함께하는 수업이다. 학생들은 자신의 심각한 재난 상황을 생각해내고 한 학기 동안 그 상황을 개선하는 스튜디오를 차리게 된다. 팀을 만들지 않고 오로지 혼자 자기 스튜디오를 차리는 것이다. 엄마가 재난의 근원이라며 귀와 마음만을 열어두고 다 내려놓으시면 좋겠다는 ㄱ은 ‘쫑긋 스튜디오’를 차렸다. 169.9㎝ 키에 여성적인 외모로 항상 놀림을 받았다는 ㄴ은 표준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재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몸몸 스튜디오’를 차렸다. 중학교 때 왕따를 당하면서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ㄷ은 그런 언니가 되겠다며 ‘요정 언니 스튜디오’를 차렸다. 아이를 많이 낳고 싶다는 ㄹ은 강서구 장애인학교 설립 공청회에서 반대하는 주민들에게 무릎을 꿇은 학부모들의 모습에 눈물이 났다면서 (무릎을 베고 서로를 위로하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며) ‘무릎 스튜디오’를 차렸다. 싱어송라이터가 되려는 ㅁ은 무릎 스튜디오 곁에 ‘흥 스튜디오’를 차렸고, 항상 누군가를 돕고 싶은 ㅂ도 ‘함께 라면’이라는 스튜디오로 그들과 연대했다. ㅅ은 이들의 활동을 보면서 공감과 연대의 이야기를 카드뉴스로 만들고 싶어져서 ‘훌훌 스튜디오’를 차렸다. ‘별 하나에 삼성과, 별 하나에 현대와, 별 하나에 에스케이’를 그리며 이미 열여섯 통의 이력서를 쓴 졸업학기 ㅇ은 그간 쓴 이력서와 거절 편지를 전시하는 ‘스켑티 스튜디오’를 차리기로 했다. 교사로서 우리가 요구한 것은 각 스튜디오는 하나의 세계이자 세계관이며 고통과 공포도 있지만 아름다움과 마술적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재난을 일으킨 대상과 싸울 도구와 무기를 준비해야 한다. 현재의 방법으로 안 될 때는 주술과 마법이 필요할 수도 있다. 거울을 도구로 사용하기로 한 ‘요정 언니’는 추석 때 힘들어하는 사촌 동생을 할머니 방에 데리고 가 자신의 손거울을 주면서 요정 언니 노릇을 했다. 그전 같으면 모른 척했을 것인데 자신의 스튜디오가 있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행동하게 되더라고 했다. 각자도생이 몸에 밴 사람은 두리번거리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 스튜디오를 갖게 된 주인은 누군가를 초대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 머릿속 시뮬레이션만 하던 이들이지만 작은 일을 성사시키면 자신감을 갖게 되고 더 대담한 일도 벌이게 된다. 이번 학기 스튜디오를 차린 학생들을 보면서 교육개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재난이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는 학생들에게 각자 자신의 스튜디오를 차리게 하자. 그토록 열심히 가르쳤는데 학생들이 못 따라와서 괴로운 교사도 재난 스튜디오를 열면 된다. 교장 선생님은 스튜디오들을 엮어서 전시와 축제의 판을 열어주는 분이다. 대학 강의실을 스튜디오와 작업실로 바꾸고 동네 주민자치 회관을 ‘재美난’ 학교 캠퍼스로 만들 수 있다면 세상은 놀랍게 달라질 것이다. 기적은 내 삶의 현장을 정직하게 들여다볼 때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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