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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안철수와 전라도 / 정남구

등록 2017-12-26 17:12수정 2017-12-28 00:47

정남구
논설위원

전라남도 해남에서 강진, 장흥, 보성, 낙안, 순천, 광양을 거쳐 하동으로 가는 지금의 국도 2호선에는 가슴 아픈 이야기가 있다. 이 도로는 2년 남짓 공사를 거쳐 1909년에 준공됐는데 그 무렵 ‘폭도 도로’라 불렸다. 일본군은 전라남도 연해 지역에서 마지막까지 항전하던 항일 의병들을 체포해 공사에 투입했다. 1914년 발간된 <목포지>에 “귀순자, 항복한 자, 체포한 자들에게 일을 시켰다”고 쓰여 있다. 전라도는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을 넘보던 일본에 맞서 농민들이 봉기하고, 을사늑약 이후에도 의병들이 끝까지 맞서 싸운 땅이다. 일본군의 살육 작전으로 인한 희생이 말도 못하게 컸다.

시간을 더 거슬러 1592년으로 가면 그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일본이 침략해오자 전라도에서 가장 먼저 의병(유팽로 의병장)이 일어났고, 전라도 의병은 충청도와 경상도로 넘어가 싸웠다. 이치와 금산 전투에서,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라도 의병들의 눈물 나는 희생이 행주대첩과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의 승리로 이어졌다. 그래서 1598년 정유재란 때는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재침하면서 “먼저 전라도를 남김없이 점령하라”고 지시했다. 일본군은 전라도에서 도륙 작전을 폈고, 산 사람의 코까지 베어 가 코 없는 사람도 많이 생겨났다.

옛날부터 농사꾼들의 땅인 전라도는 풍요로운 곳이다. 벼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산간에서 평지로, 이어 해안으로 농토를 계속 넓혀갔다. 전라도가 곡창이 된 것은 하늘이 준 혜택이라기보다는 피땀 흘린 대가다. 농사짓는 사람들은 남의 것을 빼앗을 줄 모른다. 상주 사람 견훤이 올린 후백제의 깃발 아래 사람들이 잠시 모인 적은 있지만, 전라도 사람들은 남을 지배하기 위해 국가를 만든 일이 없다. 풍부한 물산에 힘입어 음식이 발달하고, 문예가 발달했다. 다만 권력을 가진 자들한테는 빼앗을 만한 것이 많았다. 그들은 ‘풍속이 나쁘다’ 따위의 여러 핑계를 대며 빼앗는 것을 정당화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많이 나오는 고관들의 전라도 폄훼는 지금도 ‘홍어’니 뭐니 하는 비아냥의 말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으니 가소롭다. 그들이 잘 모르는 것은 전라도가 불의에 맞서는 마지막 저항의 땅이요, 전라도 사람들이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며 싸웠다는 사실이다.

나는 전라도 사람이다. 그 역사를 관통하는 한마디 말을 추적해보니 ‘사람의 도리’에 닿더라. 1980년 5월, 전두환 신군부가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면 오전 8시 각 대학 정문에 모여 군부에 항거해 싸우자고 한 약속을 유일하게 지킨 곳이 광주였다. 저항과 희생이 또 한번 반복됐으나,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람의 탈을 쓰고 해선 안 되는 짓은 어쨌든 막아야 하니까. 그게 전라도 사람이니까. 앞으로도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2016년 4월13일 20대 총선에서 전라도의 표심이 크게 흔들렸다. 오랜 저항과 희생 뒤에 따르는 피로감으로 보였다. 개표 결과 28석 가운데 국민의당이 23석을 차지했다. 실제 표심이 그렇게 한쪽으로 기운 것은 아니었다. 쏠림을 일으키는 소선거구제가 낳은 현상이었다. 지역구 득표수를 비교하면, 국민의당과 더불어민주당은 별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전라도를 기반으로 제3당이 된 국민의당이 쪼개지려고 한다. 안철수 대표는 바른정당과 통합을 추진하고, 전라도 국회의원들은 반대하고 있다. ‘중도’라는 말을 좋아하는 안철수 대표는 전라도 정신을 이미 짐으로 여기는 것 같다. 그렇다면 망설일 것이 없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녘을 보는 마음으로 편하게 놓아주어야 한다.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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