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철 화백의 <모내기>(162.1×112.1㎜, 유화, 1987)
“그림의 왼쪽 중간에 있는 시골마을이 김일성의 생가인 만경대입니까?” “그림 상단은 북한이고 하단은 남한지역을 나타내는 것입니까?” 1989년 11월16일치 <한겨레>가 전했던 한 재판정 모습이다. 그해 8월 서울시경 대공과는 2년 전 <모내기>(162.1×112.1㎜, 유화)를 그린 신학철 화백을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 제작 및 배포 혐의로 구속했다. 이 작품이 들어간 부채 1천개를 만든 민간단체 관계자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89년은 민중미술운동계에 시련의 해였다. 대형 걸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의 슬라이드가 평양축전에 보내졌다는 이유로 홍성담 화백 등 미술인들이 줄줄이 구속됐다. 내부적으론 노선 갈등이 일었다. 이 와중에 터진 <모내기> 사태는 우리 현대미술사에서 처음으로 작가를 ‘국사범’으로 만들었다. 백두산 천지 밑에서 아이들이 뛰놀며 농부가 레이건·양담배·나카소네 등을 쓸어내는 모습은 검찰의 공소장에서 “북한의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이 됐다. “탁월한 안보적 상상력에 기초해 이적표현물이라는 괴물을 찾아내려는 억지”라는 반발이 거셌지만, 공안당국은 ‘백두산 아래 복사꽃 핀 초가마을이 김일성 생가’라는 전향 간첩의 감정을 들이댔다. 80년대 초 미술계에 충격을 던졌던 신 화백의 <한국근대사> 연작의 맥락 같은 건 전혀 안중에 없었다.
작품을 돌려받지 못한 신 화백은 93년 <모내기>를 다시 그려 코리아통일미술전에 출품했다. 최근 박상기 법무장관이 서울중앙지검 창고에 보관 중인 이 작품을 국립현대미술관에 위탁·보관하도록 지시했다. 접힌 상태로 놔둬 유화물감이 많이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작품을 구둣발로 밟은 검사를 보고 “자신의 알몸이 능욕당하는 것보다 더 분노”(<한길문학>, 1990.5)했던 40대 중견화가는 70대 원로가 됐다. 검찰이 진정 과거가 부끄럽다면, 이젠 작가에게 빼앗긴 ‘자식’을 돌려줘야 한다.
김영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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