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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박찬수 칼럼] 펜스와 김여정, 누가 더 호전적으로 비칠까

등록 2018-02-14 16:57수정 2018-02-19 16:34

박찬수 논설위원실장

결과적으로, 고맙다. 평창의 성공에 도움이 됐다. 북한 대표단 아닌 펜스에 대한 사례다. 북한 최고지도자의 여동생이 개막식에 참석해 웃으며 손 흔드는 장면만큼이나,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의 못마땅한 듯한 표정과 행동은 평창올림픽을 세계적 이슈로 부각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지난 주말 주요 외신 인터넷판 헤드라인을 장식한 소재는 한국의 산골도시 경기장에 함께 앉은 펜스와 김여정을 비교하는 사진 또는 기사였다. <워싱턴 포스트>는 남북 단일팀 입장 때 문재인 대통령과 김여정이 일어나 손을 흔드는데 유독 펜스만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는 사진을 실었다. <뉴욕 타임스>는 페이스북에 ‘미소만으로 김정은 여동생은 펜스 부통령을 외교적으로 이겼다’고 썼고, <시엔엔>은 김여정의 웃는 사진과 함께 ‘미소로 올림픽 행사를 훔쳤다’고 평했다. 북한이 올림픽을 ‘가로채는 걸’ 막으러 평창에 간다고 공언했던 펜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펜스를 옹호하는 목소리가 없는 건 아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사설에서 “문 대통령이 김여정과 건배할 때 펜스는 탈북자들을 만났다. 유일하게 품위있게 행동한 이가 펜스 부통령”이라고 추어올렸다. 또 평창올림픽에서 북한이 거둔 선전 효과는 히틀러가 2차 대전을 도발하기 앞서 1936년 베를린올림픽을 열어 세계를 속인 것에 비견할 만하다고 비난했다. ‘평양올림픽’이란 정치적 조어는 국내 극우 진영만이 아니라 미국 강경보수 세력까지 내세우는 용어가 됐다. ‘평양올림픽’에 ‘히틀러 올림픽’까지 등장했으니 자유한국당으로선 얼마나 환호할 만한 일인가.

그러나 2018년의 평창은 1936년의 베를린이 아니다. 히틀러는 전쟁의 욕망과 반유대주의를 숨기는 데 올림픽을 활용했다. 평창은 정반대다. 금세라도 군사적 충돌이 일어날지 모를 동아시아 분단국가에서 지뢰밭을 피해가며 좁디좁은 평화의 길을 여는 게 ‘평창’이다. 그런 점에서 평창은 올림픽 정신에 정확히 부합한다. 세계 언론이 김여정의 미소에 주목한 건 ‘북한의 선전술에 놀아난’(존 볼턴 전 유엔주재 미국대사의 표현) 것일 수 있지만, 그 미소를 통해서라도 실낱같은 평화의 끈을 잡아보라는 기대의 표현일 것이다.

북한이 김여정의 웃음으로 내부 인권탄압과 흉포함을 가린 것은 ‘가식과 거짓’일 수 있다. <월스트리트 저널>이나 존 볼턴의 말대로, 북한은 주민 생활엔 아랑곳없이 막대한 돈을 핵과 미사일 개발에 쏟아붓고, 그렇게 국제사회의 안정을 해치는 ‘불량국가’일 수 있다. 김여정은 ‘자신의 이복형과 고모부를 죽인 바로 그 통치자의 여동생’이라는 <월스트리트 저널> 지적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북한 대표단은 평창과 서울에서 최근의 군사적 위기를 풀기 위해 ‘외교’를 하려 애쓴다는 인상을 전세계에 심어줬다. ‘외교적 노력’을 아예 무시하고 속내를 드러낸 건 펜스 부통령이다. 이매뉴얼 패스트라이시 교수(경희대)는 펜스의 행동을 보면서 “같은 미국인으로서 부끄러웠다. 미국의 보수 진영을 제외하곤, 전세계 다수의 사람들에게 미국이 (북한보다) 훨씬 더 호전적이라는 느낌을 줬다”고 말했다. 평창에서 미국이 보인 건 패권적이고 오만한 트럼프 행정부의 민낯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처럼, 평화를 위해서라면 ‘악마’와도 대화를 해야 할는지 모른다. 내면의 공격성을 감추지 않고 밖으로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상대방의 표리부동을 비난하는 미국이 북한보다 나을 건 하나도 없다. 모든 일엔 적절한 시기와 순서가 있다. 평창올림픽 개막식에 펜스와 김여정이 나란히 앉았을 때는, 공세가 아니라 평화와 화해의 몸짓을 보여줄 시간이었다. 그걸 미국은 아쉽게 흘려보냈다.

평창에서 워싱턴으로 돌아가는 길에 펜스는 북한과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을 밝혔다. 펜스는 “(비핵화를 위한) 최대의 압박 공세는 계속 강화할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대화를 원하면 우리도 대화할 것”이라며 조건 없는 대화 가능성을 내비쳤다. 마침 북한과 가까운 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는 ‘남북대화가 이뤄지는 동안엔 북한이 핵·미사일 실험을 중단한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북한의 핵·미사일 동결 가능성을 점쳤다. 실낱같은 진전이다. 이제라도 미국과 북한이 얼굴을 마주하게 되면 찬바람 불던 평창의 기억은 나름 쓸모있는 교훈이 될 수도 있으리라.

논설위원실장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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