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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세면대

등록 2018-02-14 17:36수정 2018-02-14 18:37

전우용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는 세수할 때에 고개를 숙이지 않고 빳빳이 든 채로 두 손으로 물을 찍어다가 바르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마룻바닥과 자기 저고리 소매와 바짓가랑이를 온통 물투성이로 만들었다.” 춘원 이광수의 증언인데, 나라가 망한 탓에 머리 숙일 곳을 갖지 못한 선비의 지조를 상찬한 말로 이해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평소 실익과 실용을 중시했던 이광수의 가치관에 비추어 보면, 별것도 아닌 일에 지조를 내세우며 불편을 자초하는 선비의 고루함을 조롱한 말이라고 해석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 신채호의 특이한 세수 버릇에 대한 증언을 남긴 이는 이광수뿐이다. 신채호가 아무도 안 보는 데에서조차 옷과 마룻바닥을 다 적시며 불편하게 세수했을까? 그보다는 지조를 가볍게 여기는 이광수를 깨우치려 짐짓 그런 행동을 보여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광수가 가르침을 받고도 깨닫지 못했을 뿐.

신채호가 보통 사람들처럼 고개를 숙이고 세수를 했더라도, 저고리 소매와 바짓가랑이, 마룻바닥을 적시지 않기란 어려웠다. 저 시대 겨울에 세수를 하려면, 먼저 세숫대야를 부엌에 가져가 가마솥에서 뜨거운 물을 한 바가지 퍼 담은 다음, 우물가로 가서 찬물 한 바가지를 섞고,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씻어야 했다. 마루에 세숫대야를 올려놓고 씻는 일은 집안의 어른만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벽에 수도꼭지와 세면대를 부착한 다음에야 사람은 서서 허리만 숙이고 얼굴을 씻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세면대를 최초로 사용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확실치 않다. 상수도 공급이 시작된 해가 1909년이고 실내 화장실에 양변기를 놓았다는 윤덕영의 ‘아방궁’ 건축공사가 1911년에 시작됐으니, 이 무렵부터 극소수 부호의 집에 설치됐을 것으로 보인다. 재질은 창덕궁 희정당에 있는 욕조와 마찬가지로 금속에 유약을 입힌 법랑(琺瑯)이었을 것이다.

지구상에는 아직 세면대를 못 쓰는 사람도 많지만, 현대 한국인의 대다수는 서서 세수하는 인간이다. 이들은 세수할 때조차 무릎 꿇거나 쪼그리고 앉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몸을 덜 굽히는 만큼 당당해지고 지조가 곧아졌는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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