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남구
논설위원
1591년 3월, 일본에서 돌아온 통신사 황윤길은 부산에서 ‘왜적이 반드시 침범해 올 것’이라고 장계를 올렸다. 그러나 함께 갔던 김성일은 “그런 낌새는 발견하지 못했다”며 황윤길이 민심을 동요하게 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왕의 물음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 된다”고 답했다. 조정은 일본이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고 홀로 주장한 그의 말을 따랐다.
그가 일본에 머물 때 정사 황윤길과 서장관 허성에게 보낸 편지들엔, 대국(조선)의 사신을 대하는 일본의 무례한 의전을 문제삼으며 자신과 다른 행보를 하는 두 사람을 비판한 내용이 많다. ‘사대자소’의 관념에 몰두한 것 아닌지, 두 사람의 태도에 기분이 상해 삐딱선을 탄 것은 아닌지, 만나면 물어보고 싶다.
최근 미국의 잇따른 통상 규제 조처를 두고 “왜 우리한테만”이라는 말을 들을 때, 나는 김성일의 오판이 생각난다. 우리한테‘만’?
트럼프는 2년 전부터 일관된 언행을 보이고 있다. 이른바 ‘러스트 벨트’의 백인 하층 노동자들을 핵심 지지층으로 삼는 트럼프는 대미 무역흑자가 많은 나라들을 쉼없이 공격해왔다. 그는 ‘미국 내 일자리’와 ‘지적재산권 보호’라는 깃발을 들고 자유무역협정을 깨고, 통상 규제 수단을 닥치는 대로 꺼내고 있다.
핵심 타깃은 대미 무역흑자가 가장 많은 중국이다. 트럼프의 방해로 중국 기업 알리바바는 미국 금융회사 머니그램 인수를 포기했고, 미국 이동통신사 에이티앤티(AT&T)는 화웨이의 스마트폰을 팔려던 계획을 철회했다. 트럼프는 중국산 알루미늄 제품에 대해 업계의 제소 없이 반덤핑·상계관세 직권조사를 개시했다. 26년 만의 일이다. 지난해말 현재 중국은 미국한테서 163건의 수입규제를 받고 있다. 중국 다음으로 인도(39건), 한국(31건)이 많다. 미국이 외국산 세탁기, 태양광 패널에 긴급수입제한 조처를 취해 우리나라도 타격을 볼 테지만, “우리한테만”이란 표현은 사태를 잘못 본 것이다.
미국 상무부는 지난 16일, 무역확장법 232조를 꺼내들었다. 국가안보 위협을 구실로 외국산 철강·알루미늄 제품에 관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제안했다. 모든 나라 제품에 24% 관세를 부과하는 안과, 한국을 포함한 12개국에만 53%를 부과하는 안을 냈다. 이 12개국에는 미국 동맹국 가운데 한국만 포함됐고, 이는 ‘문재인 정부의 반미 태도’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근거 없는 얘기다. 우리나라는 중국 철강을 가장 많이 수입한다. 트럼프는 지난해 6월 한-미 정상회담 기자회견 때 “중국산 덤핑 철강제품의 수입을 한국이 금지해야 한다고 문 대통령에게 말했다”고 한 바 있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중국산 철강 수입을 크게 줄였지만, 규제 리스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동맹이라고 헛물을 켜서는 안 된다. 미국은 1997년에, 우리나라를 ‘아이엠에프(IMF) 신탁통치’로 보낸 나라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있는 트럼프가 통상정책의 큰 줄기를 바꿀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런 정책이 미국 소비자들에게 가격 인상이란 부담으로 돌아올 테지만, 나중 일이다. 트럼프가 모르고 하는 일도 아닐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불합리한 조처에는 결연히 대응하라고 지시했지만, 큰 의미를 두기 어렵다.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는 결론이 나는 데 몇년이 걸리고, 결과에 미국이 따르지 않아도 별 도리가 없다.
어쩌라고? 견뎌야 한다. 견디며 길을 찾아야 한다. 이럴 때, 밖을 가리켜야 할 손가락을 안으로 돌리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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