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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박찬수 칼럼] ‘자유’와 민주주의, 리버럴

등록 2018-03-07 18:29수정 2018-03-07 19:39

바람직한 민주주의의 구체적 형태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1970년대엔 ‘한국적 민주주의’란 말이 유행했다. ‘자유’든 ‘한국적’이든 또는 ‘민중’이든, 민주주의 앞에 수식어가 붙을 때 논란은 커지고 공통의 목표는 훼손되기 쉽다.
박찬수
논설위원실장

‘자유’라는 말만큼 요즘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는 단어도 드물다. 주말마다 광화문에서 열리는 태극기집회에 가면 ‘자유민주주의 수호’란 구호를 귀가 따갑도록 들을 수 있다. 그분들이 말하는 자유는 자유한국당의 ‘자유’와 일맥상통하지만, 1960년 4·19 직후 김수영 시인이 쓴 시의 한 구절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에 나오는 ‘자유’와는 사뭇 다르다. 언어란 게 쓰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손쉽게 훼손되거나 왜곡되는 것이니 그럴 수 있다고 치자. 민주주의를 유린한 박정희 대통령이 5·16 쿠데타로 만든 정당이 ‘민주공화당’이고, 그 뒤를 이은 전두환 정권의 ‘민주정의당’이 지금 회자되는 ‘정의’와는 별 상관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십수년 전 워싱턴특파원 시절, 가장 곤혹스러운 영어단어 중 하나가 ‘리버럴’(liberal)이었다. 미국에선 ‘리버럴’ 하면 보통 민주당 지지자나 진보주의자를 뜻하는데, 이게 문장 속에 녹아 있으면 그게 진보적이란 뜻인지 아니면 보수적이란 건지 판단하기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 ‘자유’의 함의가 변했듯 미국 역시 ‘리버럴’의 의미가 시대가 지나면서 달라졌기 때문이다. 몇년 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극우 성향의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당신은 미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liberal) 대통령입니까?” 오바마는 “많은 면에서 (공화당 출신인) 리처드 닉슨이 나보다 훨씬 진보적(liberal)이었습니다”라고 답했다.

이 대답에 대해 몇몇 미국 언론은 “오바마가 ‘리버럴’이란 단어가 가진 ‘자유분방하고 질서가 없다’는 부정적 의미를 희석하려 닉슨을 끌어들였다”고 평했다. 그런 평가가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20세기 초만 해도 ‘리버럴’은 보수주의자들이 좋아하는 단어였던 건 분명하다. 1930년대 대공황 시절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뉴딜 정책의 이데올로기로 ‘자유주의’를 내세우면서부터 ‘리버럴’은 국가의 책임과 개입을 중시하는 ‘진보적’이란 함의를 획득했다. ‘자유’(리버럴)라는 단어가 혼란스럽게 쓰이는 건 한국이나 미국이나 다르지 않다.

최근 개헌 논의 와중에 헌법 전문과 4조의 ‘자유민주적 사회질서’란 표현이 쟁점으로 떠올랐다. 보수언론과 야당은 “더불어민주당이 마련한 헌법 초안에서 ‘자유’가 빠지고 ‘민주적 사회질서’란 문구만 남았다”고 공격했다. 민주당은 서둘러 “실수다. 다시 원상복구했다”고 해명했지만, 통할 리가 없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좌파 사회주의 체제로 나라를 바꾸겠다는 것”이라고, 정태옥 대변인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 발전 토대의 근본을 허물려는 것”이라고 맹비난했다. 이 소동엔 우리 모두의 가치에 관한 중요한 모티브가 담겨 있다. 바로 ‘자유’(또는 리버럴)의 다층적 의미에 대한 소환이다.

자유한국당은 자유민주주의가 ‘해방 이후 한국 정통성의 근본’이라 주장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자유민주주의’가 특정 정당의 이념으로 등장한 건, 1963년 박정희 ‘군사혁명정부’가 급조한 공화당의 강령 1조에 “민족 주체성을 확립하며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확립을 기한다”고 적시한 게 시초다. 1950년대 양대 정당인 자유당과 민주당의 정강 1조엔 ‘진정한 민주주의 정치체제 확립’(자유당), ‘민주주의 발전을 기한다’(자유당)고만 적혀 있었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란 표현은 1972년 박정희 영구집권을 위해 만들어진 유신헌법 전문에 처음 담겼다.(이인재 연세대 교수 ‘역대 대한민국 헌법의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이 사실은 자유한국당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가 실제론 ‘자유’에 방점을 찍기보다 ‘반공’ ‘반북’을 위한 도구의 성격이 짙다는 걸 시사한다. 이승만 정권 시절엔 보수정당도 선호했던 ‘민주주의’란 표현에 5·16 쿠데타 이후 ‘자유’가 더해진 건, 아마도 박정희 대통령의 공산주의 전력을 희석하려는 의도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래도 과거 미국 보수주의자들이 ‘리버럴’에 집착했던 건 ‘개인의 자유’를 최대로 확장하는 게 선이라는 인식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지금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야당과 보수언론, 태극기부대의 외침에선 기본권에 속하는 자유에 관한 존중을 찾기 어렵다.

바람직한 민주주의의 구체적 형태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1970년대엔 ‘한국적 민주주의’란 말이 유행했다. ‘자유’든 ‘한국적’이든 또는 ‘민중’이든, 민주주의 앞에 수식어가 붙을 때 논란은 커지고 공통의 목표는 훼손되기 쉽다.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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