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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홍세화칼럼] 다시 희망버스를!

등록 2018-03-22 18:48수정 2018-05-11 16:19

전주택시 노동자가 200일 동안 고공농성을 벌여도 고용노동부 장관이나 노사정위원장의 방문은 기대할 수 없는 게 이른바 ‘노동존중사회’의 실상이다. 그리하여 다시금 “희망버스를 타자!”고 호소하는 글을 쓰게 되었다. 택시노동자 김재주씨가 전주시청 앞 20m 높이 조명탑에 오른 지 3월22일로 꼭 200일이 되었다.
홍세화
장발장은행장, ‘소박한 자유인’ 대표

불온한 탓이겠다. 문재인 정권이 민주노총 한상균 전 위원장을 풀어주지 않는 것에서 자유주의 정권이라는 성격과 함께 한 위원장의 출신 계급이 작용했으리라고 보는 것은. 현 정권 실세 중에 학연 등으로 줄이 닿는 사람이 있거나 탁현민 행정관처럼 강력한 보호자가 있다면 그의 처지는 달랐을지 모른다. 가령 작년 흥행에 성공한 영화 <1987>이 노동자들의 7, 8, 9월 민주노조 투쟁을 담지 않은 ‘1987 상반기’였다고 말할 줄 아는 민주주의자라면, 한 전 위원장이 저지른 죄가 민주노총 위원장으로서 신자유주의 기조의 ‘기업 하기 좋은 나라’에 맞섰다는 점뿐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를 감옥에 계속 가두고 있는 건 새 헌법에 저항권을 포함시키겠다는 문 정권의 의지와도 모순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이어 이명박 전 대통령도 곧 투옥될 참이다. 누군가의 말을 빌려, 촛불은 기존의 것을 무너뜨리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새로운 것을 형성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와 관련하여 “노예의 반란은 설령 성공한다고 해도 주인만 바뀔 뿐 노예는 노예로 남는다”는 명제를 적용시키고 싶진 않지만,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는 말은 하지 않을 수 없다.

대의로는 지방분권을 강조하면서 기초의원을 2인 선거구로 쪼개는 일을 “북한의 사회주의 노선에 전도된 문재인 정권과의 체제 전쟁을 선포한다”는 자유한국당과 짝짜꿍이 되어 관철하고 있다. 이 또한 불온한 탓이겠다. 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 교묘히 역할 분담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될 때가 없지 않다. 평등권을 주장하면서 성적 지향과 관련된 차별금지 조항은 비켜가는 것은 ‘부자 몸조심’인가, 비겁함인가. 전교조가 아직 법외노조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명박근혜 정권 동안 ‘배제당한 존재’들의 고공농성 등 사회적 아우성에 모르쇠로 일관했던 것에 익숙해진 탓인가, 김득중 쌍용차 노조위원장이 회사가 2017년 상반기까지 약속했던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20여일 넘게 단식하고, 파인텍 노동자들과 전주택시 노동자가 노사 합의 사항을 지키라고 130일, 200일 동안 고공농성을 벌여도 고용노동부 장관이나 노사정위원장의 방문은 기대할 수 없는 게 이른바 ‘노동존중사회’의 실상이다. 이 봄을 따뜻하게 보내는 ‘촛불혁명’의 수혜자라면 이 봄이 오히려 더 춥고 잔인하게 느껴질 이들에게 눈길이라도 보내는 게 인지상정일 텐데 무감한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금 “희망버스를 타자!”고 호소하는 글을 쓰게 되었다. 택시노동자 김재주씨가 전주시청 앞 20m 높이 조명탑에 오른 지 3월22일로 꼭 200일이 되었다. 나 또한 장기 고공농성에 무감해진 자신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200일’이라고 별생각 없이 썼다가 잠시 돌아보았다. 그에게 허용된 공간이 가로 180㎝×세로 70㎝이다. 그 공간을 6개월 넘는 동안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전주시청과 택시사업주, 노조가 합의한 전액관리제를 전주시청이 이행하지 않자, 지난해 9월4일부터 고공농성에 돌입했다.

택시노동이 고된 직업이라는 것은 해보지 않은 사람도 알 수 있다. 회사(법인) 택시는 프랑스 파리든 서울이든 전주든 ‘노골적인 수탈구조’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지만, 사업주와 노동자 사이의 배분 비율은 노사 간 역학 관계에 의해 규정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날 수 있다. 북유럽의 택시노동자에 비해 열악한 처지에 있는 파리의 택시노동자이지만 한국의 택시노동자에 비하면 그야말로 양반이다. 만약 프랑스 택시노동자들에게 한국의 택시노동자와 같은 조건으로 일하라고 한다면 집단으로 택시를 불태우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국가주의나 질서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지 않고 나름 노동자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구성원 대부분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육체적 품이든 정신적 품이든 품을 팔아 생존하는 노동자인데도 노동자 의식을 갖기는커녕 노동자로서의 ‘자기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돈 없는 사람은 사람대접받기 어려운 한국 사회에서 법인택시 노동자는 문자 그대로 ‘벌거벗은 생명’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들에게 ‘택시노동자가 매일 수입금 전액을 회사에 입금하고, 회사는 택시노동자에게 월급을 주는 전액관리제’는 최소한의 생존조건이다. 그런데 더불어민주당이 장악하고 있는 전주시청은 노사 간 균형자 역할을 하는 대신에 지역 토호들이 장악하고 있는 사업주 편을 일방적으로 들어주고 있다.

존재를 이반한 의식들이 만연한 사회는 온유할 수 없고 거칠다. 소통과 설득, 타협과 양보는 설 자리가 없고 왜곡된 힘의 관계만 남는다. 1997년 살인적인 사납금 제도가 불법화되었지만 전국의 법인택시 대부분은 일 단위에서 월 단위로 변경한 불법적 사납금제를 고수하고 있고 지자체들은 이를 묵인하고 있다. 심지어 하루 10시간 이상 일해야 가능한 수입금을 사납금 또는 기준금으로 납부하고 소정 근로시간을 축소 적용해 하루 4시간의 최저임금을 받는 사례까지 있다고 한다. 이렇게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운행되는 택시이니 사고율이 높을 수밖에 없다. 법인택시 사고율이 전국 사업용자동차 교통사고율의 45.5%, 사망사고율 1위를 차지한다고 한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택시지부는 김재주씨의 고공농성과 동시에 전액관리제와 최저임금제를 무력화하는 고용노동부 행정지침의 폐기를 위해 세종시 고용노동부 앞에서 천막농성도 벌이고 있다. 김씨를 외롭게 두지 않기 위해, 택시노동자들의 싸움에 연대하기 위해 서울 대한문에서 오전 10시에 출발하는 ‘3·31 뛰뛰빵빵 택시 희망버스’를 기획하게 된 것이다.

다시는 희망버스를 말해야 하는 날이 오지 않으리라 기대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후 첫 일정의 하나로 인천공항을 방문해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역설하고 최저임금이 꽤 높은 수준으로 인상되면서 적폐청산 이상으로 노동정책 변화에 대한 기대가 컸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만의 일일까, 최저임금 인상에 대한 반대에 부딪히자 곧 수세적으로 바뀌는 게 감지되었다. 자영업자들의 어려움을 들어 최저임금 인상에 반대한 세력은 자영업자들보다 자영업자들을 수탈하는 건물주들과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세력이었다. 세계 최고를 차지하는 한국의 자영업자 비율은 5년 안에 70%가 망한다는 통계와 함께 그 대부분이 창업한 게 아니라 일자리가 없거나 일자리에서 쫓겨난 사람들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그런데 자영업자들조차 노동자 임금을 상수, 월세를 변수로 인식하지 않고, 월세를 상수, 노동자 임금을 변수로 인식한다. 임금인상에 반대하기보다 토지 공개념과 보유세 강화를 요구하는 등 발본적으로 접근해야 마땅한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이른바 ‘4차 산업혁명’으로 일자리는 질적으로 더 열악해지고 양적으로 더 줄어들면서 부의 쏠림 현상, 양극화는 더 심해지고 청년세대는 아무리 노력해도 부모세대의 부의 격차를 만회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자영업자들에게도, 장래를 설계하기 어려운 청년세대들에게도 높은 월세와 집값은 폭력 그 자체이고 헬조선의 기본 골조물이다. 문재인 정권은 주 52시간 근로시간 단축과 교대제 개편을 통해 일자리를 늘릴 수 있음에도 공세적으로 나서는 대신 연장-휴일 중복할증을 없앴고, 최저임금위원회에서 상여금을 최저임금에 포함하는 안을 통과시키려는 데 머물러 있다.

희망버스는 희망을 싣고 달려야 한다. ‘홀로서기’ 세상이지만 돈도 없고 권력도 없는 이들에겐 머릿수뿐, 3월31일, 허공에 매달린 택시노동자와 한 사람이라도 더 희망의 목소리를 나눌 수 있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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