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엔 신여성의 반대, 즉 신남성이 사회적으로 시급히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기존의 남성성의 패턴, 즉 ‘남성다움’에 대한 사회적 통념들이 현재로서 백해무익이기 때문이다. 사실 기존의 남성성에 대한 사회적 ‘상식’은 현재로서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고 있을 뿐이다.
신남성, 즉 힘과 배짱, 신분상승과 자아의 무한확대가 아닌 배려와 돌봄, 연대와 동감을 남성의 당연한 특징으로 볼 줄 아는 탈폭력적 남성이 사회에서 일반화돼야 한다. 눈물 흘릴 줄 알고 유모차를 끌고 다니며 육아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남성이 사회적 표준이 돼야 하는 것이다.
100년 전의 조선 같으면 일본에서 건너온 ‘신여성’이라는 말이 막 유행을 탔다.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신여성들은 남성들과 같아지려고 노력했고, 그렇게 해서 여성들의 정당한 몫을 쟁취하려 했다. 신여성들은 단발을 하고 팔다리를 노출시키며 그 당시로서는 도발적인 옷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남자들처럼 고등교육을 받으려 했고 남자들처럼 직장생활을 하려고 했으며 남자들처럼 성관계의 자유를 즐기려고 했다. ‘정조’(貞操)가 여성들에게 여전히 절대적으로 강요됐던 당시에, 급진적 신여성들은 정조를 ‘선택사항’으로 다시 정의하거나, ‘남자들도 정조를 지켜야 한다’는 방식으로 평등을 요구했다.
이들의 선각적인 노력들이 없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양성평등이 당위 차원에서라도 당연시되는 사회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엔 신여성의 반대, 즉 신남성이 사회적으로 시급히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기존의 남성성의 패턴, 즉 ‘남성다움’에 대한 사회적 통념들이 현재로서 백해무익이기 때문이다. 사실 기존의 남성성에 대한 사회적 ‘상식’은 현재로서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고 있을 뿐이다.
요즘에는 대부분의 양식 있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페미니즘을 수용하긴 하지만, 일부 도식주의자들은 ‘여성은 계급이 아니’라며 여성 문제를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 지금도 통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남성성 이미지의 골자가 계급사회가 국가의 형태를 취하기도 전에 어느 정도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미 신석기 인간들에게 남성성은 수렵 능력, 나아가서는 폭력의 능력과 같은 의미를 지녔다. 성인 남자가 되기 위해서는 위험하고 아픈 성인식을 통과해야 했지만, 그만큼 짐승을 잡고 싸울 줄 아는 남성은 여성 위에서 군림할 수 있었다. 국가가 성립되고 씨족 사이의 무력충돌이 전쟁이라는 대규모 폭력의 형태를 취하고 나서는 이와 같은 남성성의 이미지는 구체화되고 공고화됐다. 이제 남근은 평상시 가족에 대한 생계보장의 의무와 전시의 전투 의무, 그리고 항상적으로 여성을 지배할 권리를 의미하게 됐다.
구한말에 조선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던 외국 철학자 중의 한 명은 사회진화론의 창시자인 스펜서(1820~1903)였다. 스펜서의 우승열패(優勝劣敗), 적자생존 이야기를 국내 계몽주의자들도 인용하곤 했지만, 경쟁을 ‘진보의 어머니’라고 생각했던 이 빅토리아 시대 사상가는 역설적이게도 ‘문명인류’에게 더 이상 무력 경쟁이 불필요할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그의 생각으로는 공업화되고 전세계적 시장을 이룬 ‘문명사회’에서는 경쟁은 주로 경제적 의미를 갖게 되어 남성들은 기존의 전투성을 잃게 될 것이었다. 그가 죽은 지 11년이 지나고 나서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는 바람에 그 낙관론은 웃음거리가 됐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를 보면 그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예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게 무슨 뜻인가?
일면으로는 스펜서의 예언은 적중했다. 굳이 비교하자면 (일부 사대부 등을 제외한) 구한말의 조선 남성은, 평균적으로 오늘날 보통의 한국인 남성에 비해서 주먹을 쓸 일이 더 많았다. 구한말 때만 해도 매년 사상자를 내곤 했던 석전(石戰)이라는 집단 투석전이 전국 곳곳에서 정월 대보름에 행해졌고, 한양 근처에서도 삼문(숭례문, 돈의문, 소의문) 밖 주민과 아현마을 주민들이 서로 돌팔매질을 해서 피를 흘렸다. 운이 나쁜 참석자가 돌에 맞아 죽는 일이 벌어져도 멈추지 않았다. 남성으로서는 이 정도의 위험은 감수할 줄 알아야 되며, 이 정도의 폭력을 행사할 줄 알아야 했다. 오늘날 같아서는 경찰이나 법원이 해결할 많은 일상적 갈등들이 주먹으로 해결되는 것도 보통 일이었다. 2010년대 대한민국의 평균적 남성이 학교와 군대 내지 예컨대 대학 운동부와 같은 폐쇄적 소사회를 벗어나면 물리적 폭력과 거의 관계없는 삶을 살 수도 있는 풍경은, 구한말 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데 일면으로 ‘힘’으로서의 남성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도 그대로 유효한 측면이 있다. 단, 이제 남성과 ‘힘’의 관계는 주로 소비를 매개로 해서 이루어진다. 특히 시각적 소비 말이다. 선수들의 건강에는 대단히 위험하지만 종합격투기 시합들을 눈요깃거리 삼아 즐겨 보는 중산층 남성들의 수는 적지 않다. 특히 엑스트라들이 촬영 과정에서 다쳐도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도 못하지만, 전투·격투 장면이 많은 영화들이 여전히 흥행을 탄다. 싸움 장면에 잘 나오는 남성 배우는 표준적 아이돌이 되고 몸짱으로 유명세를 탄다. 시각적 소비를 넘어 신체를 통한 근육질의 소비도 잘 이루어진다. 남자아이가 유치원 때부터 태권도 도장에 다니는 것은 그저 정상이며 돌봄의 한 형태다. 웰빙, 몸만들기는 물론 킥복싱부터 무에타이까지 각종의 무술들을 익히는 것도 특히 ‘여유 있는 집안’이면 자주 볼 수 있다. 더 이상 실전과는 거의 관계없지만, ‘힘’과 ‘주먹’은 여전히 남성성과 쉽게 연결된다.
주먹이 약한 남성이라도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는 현대 사회인데도 남성과 주먹, 공격 등이 여전히 연결되는 이유는? 스펜서의 ‘경제 경쟁’의 시대라 해도 기존의 남성성 패턴들은 그대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경쟁이 주된 이데올로기가 된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주먹이야 굳이 실생활에서 그다지 필요 없다 해도, 경쟁의 주체들은 여전히 ‘야수’여야 한다. 역설적으로 주먹이 중요했던 과거에 비해 오늘날 경쟁만능 시대의 세상은 더욱더 모두와 모두의 싸움터다.
정월 대보름의 석전이 폐지된 지 100년이 지났지만, 인제는 매일매일이 마음의 피를 흘리고 마음의 상처를 입어야 하는, 주먹이 필요 없는 싸움의 연속이다. 학습경쟁은 유치원 때부터 시작되고 ‘명문대’ 입시를 위한 무한경쟁은 이미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본격화한다. 설령 ‘명문대’를 들어간다 해도 정규직이 되기 위한 경쟁과 승진 경쟁 등을 하루도 쉬지 않고 은퇴하기 전까지 해야 할 것이다. 남자가 경쟁사회의 가족부양 책임자로 인식되는 한, 남자야말로 매일매일 포성이 들리지 않는 이 전투의 병사가 돼야 한다.
주먹보다 암기에 필요한 기억력이 더 중요하고, 펀치보다 ‘윗사람’에 대한 비위 맞추기, 아부, 눈치보기 능력이 더 요구되는 싸움터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의 ‘출세를 위한 전투’에는 격투기나 무술 못지않은 무자비함과 기민함, 철두철미한 전략과 전술, 자기통제력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사무실의 ‘조용한 전쟁’에서 이기려는 남성은 <손자병법>과 <삼국지>를 애독한다. 그리고 신석기 이래 ‘싸우는 사나이’의 고정관념대로, 여성에 대한 군림의 기회를 이 전쟁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전리품으로 여기는 것이다.
남성의 사회적 신분 상승은 보다 많은 여성들에게 보다 쉽게 접근해 보다 자주 성착취를 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진다. 최근 미투 운동이 밝혀낸 대로 국내에서 각종 성추행·성폭력이 각계각층에서 일상이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이와 같은 남성 사회의 추한 ‘통념’이 깔려 있는 것이다.
성추행·성폭력 근절의 길은 신고의 간편화와 처벌 강화, 2차 피해 예방 노력에도 있지만, 동시에 남성성의 패턴이 혁명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말 그대로 신남성, 즉 힘과 배짱, 신분상승과 자아의 무한확대가 아닌 배려와 돌봄, 연대와 동감을 남성의 당연한 특징으로 볼 줄 아는 탈폭력적 남성이 사회에서 일반화돼야 한다. 눈물 흘릴 줄 알고 유모차를 끌고 다니며 육아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남성이 사회적 표준이 돼야 하는 것이다. ‘계집애 같은 머슴애’는 여전히 몰상식한 남자들 사이에서 모욕으로 통하지만, 사실 ‘계집애 같은 머슴애’들이 흔할수록 살기 편한 사회라고 본다. ‘계집애 같은 머슴애’들이 다수가 돼야 대한민국은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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