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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지석 칼럼] 핵·평화 복식부기와 ‘뒤늦은 후회’

등록 2018-04-04 16:37수정 2018-04-04 19:28

김지석
대기자

‘복식부기가 없는 자본주의는 상상할 수 없다.’

회계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으로 평가받는 복식부기지만 기본 원리는 간단하다. 계산이 틀린 경우 바로 알아볼 수 있도록 거래 내용을 대변과 차변 양쪽에 동시에 써넣으면 된다. 중세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이 회계 방식이 없었다면 복잡한 거래를 감당해야 하는 자본주의도 발전하지 못했을 법하다. 우리나라에선 그보다 200년 이상 앞선 고려 전성기에 비슷한 방식의 사개송도치부법이 수도인 송도(개성)를 중심으로 쓰였다. 사개(四介)는 부기 문서가 자산·부채·이익·손해 등 4개라는 의미다.

복잡한 북한 핵 문제를 푸는 데도 복식부기에 해당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차변과 대변에 해당하는 것이 무엇일까? 비핵화와 평화체제로 보면 무난하다.

정부가 추진하는 비핵화 방법론은 ‘포괄적이고 단계적인 방식의 타결’로 요약된다. ‘포괄적’이란 말은 주고받을 카드를 모두 포함하는 큰 틀을 한꺼번에 짠다는 뜻이고, ‘단계적’은 그 내용을 현실성 있는 시간표에 따라 잘 배치한다는 얘기다. 북한은 비핵화의 조건으로 자신에 대한 ‘군사적 위협 해소와 체제 안전 보장’ 또는 ‘평화 실현을 위한 한국과 미국의 단계적·동시적 조처’를 말한다. 한마디로 좁게는 한반도, 넓게는 동북아 전체의 평화체제 구축이다.

평화체제는 제도적 측면과 비제도적 측면으로 나뉜다. 비제도적 측면은 경제·사회·정치 협력을 통한 남북한 및 동북아 나라들 사이의 의존성 제고와 힘의 균형 등을 포함한다. 곧 평화 유지가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상황 자체가 평화체제다. 유럽연합 나라들 사이의 전쟁을 생각하기 어려운 것과 같다. 하지만 그 상태까지 가려면 시간이 걸린다.

당장 중요한 것은 제도적 측면이다. 이는 세 개의 동심원으로 짜인다. 우선 남북한이 중심이 되고 관련국이 보장하는 평화협정이다. 이 협정의 체결과 이행은 좁은 의미의 평화체제 구축과 동의어로 쓰일 정도로 핵심 자리를 차지한다. 그다음은 관련국 사이 관계 정상화로, 구체적으론 북-미, 북-일 수교다. 특히 북-미 수교는 비핵화 완수와 평화협정 이행에 필수다. 마지막으로 동북아 나라들 사이의 안보기구 결성이다. 북한이 비핵화를 결단하더라도 미-중 군사 대결이 거세진다면 비핵화 과정은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는 핵 동결, 신고, 사찰, 폐기, 검증을 모두 거쳐야 한다. 북한의 핵 수준이 상당하고 무기·원료·시설이 곳곳에 있는 만큼 만만찮은 시간이 요구된다. 그 항목과 시간표가 차변에, 이에 상응하는 평화체제의 내용이 우변에 기재돼야 한다. 동결 이후 신고와 사찰, 폐기와 검증을 하나로 묶더라도 두세 단계가 된다. 평화협정과 북-미 수교를 각 단계의 중심에 두되, 맨 앞에 핵 동결에 상응하는 조처로 종전선언을 놓을 수 있다. 북한에 절실한 경제 관련 조처와 남북 관계는 비핵화·평화체제의 이행 수준에 맞추면 된다.

이달 말 남북정상회담은 이런 큰 틀을 짜는 자리다. 지지율이 떨어진 상태에서 중간선거를 앞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비핵화라는 열매만 바라본다. 우리가 밑그림을 잘 그려주면 괜찮게 색칠을 하겠지만, 미국 정부 스스로 충분하고 세심한 사전 준비를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우리가 미국을 움직이는 만큼 북한도 끌려오며, 그 역도 진리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기대는 것도 우리 정부의 역량이다. 그는 최근 중국 방문을 하면서 납작 엎드리는 모습을 보였다. 보험용으로 대중 관계 개선에 나섰다는 말이 틀리진 않지만,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라는 판단이 더 그럴듯하다.

“창밖에 내리는 빗물 소리에 마음이 외로워져요. 지금 내 곁에는 아무도 없으니까요. ~계절은 소리 없이 가구요 사랑도 떠나갔어요. 외로운 나에겐 아무것도 남은 게 없구요. 순간에 잊혀져갈 사랑이라면 생각하지 않겠어요. 이렇게 살아온 나에게도 잘못이 있으니까요.”

가수 최진희가 지난 1일 예술단 평양 공연에서 부른 ‘뒤늦은 후회’다. 김 위원장은 공연 뒤 최씨를 만나 “그 노래를 불러줘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 최씨는 자신의 곡도 아닌 이 노래를 왜 부르라고 했는지 알겠더라고 했다.

집권 8년째를 맞는 북쪽 젊은 지도자는 노래 가사처럼 지금 자신의 곁에 아무도 없음을 절감하고 뒤늦게 후회하며 새 길을 찾으려 애쓰는 걸까.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판은 그렇게 짜이고 있다.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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