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얼마 전 종영한 <윤식당 2>는 티브이를 즐겨 보지 않는 나에게 보는 즐거움을 선사한 흔치 않은 프로였다. 다만 그 즐거움의 대상은 말쑥한 외모를 뽐내는 연예인도, 파인 다이닝의 외양을 갖추고 대단한 것인 양 팔려나가는 김치전이나 호떡도, 그것을 먹고 흐뭇해하는 다국적의 중산층 백인들도 아니었다. 깨끗하게 정돈된 거리와 적당히 붐비는 주민들이 활기를 불어넣는 스페인의 소도시 가라치코의 정경과, 그 배경에 자리한 한없이 맑고 푸른 하늘이었다. 자연을 해치지 않는 수준으로 개발된 도시에서 소규모 경제활동만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며 동네 이웃과 우정을 나누는 가라치코 주민들의 모습은, 불과 몇십년 전 한국 사회에서도 퍽 자연스러웠던 모습이다. 그 시절을 닮은 풍광이 예능의 소비 대상이 될 줄은 누구도 몰랐겠지만, 이제는 먼 타국의 맑은 자연이 전파를 타고 이윤을 창출할 만큼 공해는 그야말로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갈수록 더 끔찍한 수준으로 하늘을 점령하는 미세먼지에 맞서 황사마스크를 쟁여놓고 대기오염지수를 확인하는 일도 더는 유난스럽지 않게 되었다. 미세먼지에 대해 되풀이되는 레퍼토리는 미세먼지를 유발하는 국내 요인과 국외 요인을 둘러싼 논쟁일 것이다. 국내에서 운영되는 공장 및 발전소를 비롯하여 차량에서 배출되는 오염물질의 영향이 무시 못할 수준이라는 진단에는, 중국에서 유입되는 미세먼지의 영향이 절대적이라는 목소리가 따라붙는다. 다소간의 분노마저 동반한 이 목소리는 재앙에 가까운 사태가 빨리 해결되기를 촉구하는 것이겠지만, 책임 소재를 따지고 거기에 비난의 화살을 퍼붓고 싶은 회피 심리와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아무리 회피하고 싶다 한들 미세먼지에 관한 한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책임을 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메이드 인 차이나’를 꼬리표로 달고 있는 무수한 재화로 둘러싸인 우리의 삶이 중국발 미세먼지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값싼 지대와 임금을 좇아 중국에 세워진 공장에서 생산되는 물품의 가성비에 만족하면서, 맑은 공기를 비용으로 치르게 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미세먼지의 습격은 이윤을 절대적으로 추구하는 자본의 흐름에 무비판적으로 편승해온 우리의 삶이 감춰온 민낯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요한 재화를 언제든지 자유롭게 수급하는 문명화된 삶을 누릴 수만 있다면, 과연 인간은 지구 구석구석까지도 샅샅이 다 말아먹을 태세다. 불행하게도 그에 따른 이윤을 추구하는 이들은 세계의 운명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그런 끔찍한 무관심 속에서나 가능할 법한 사고방식 및 생활방식은 각종 매체를 통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으로 우리의 뇌리에 각인되어왔다. 놀랍게도 <윤식당 2>에서 눈호강을 시켜주었던 가라치코의 인간적인 면모마저도 수세기 전 숱한 나라들을 착취하며 번영했던 스페인의 식민정책이 동반한 이윤인 셈이다. 가라치코가 속한 카나리아제도는 기후가 온화하고 자원이 풍족하여 오래도록 서구의 침탈을 받았으며, 15세기 스페인이 점령한 이후 지금까지 스페인령으로 남아 있는 곳이다. 최근 유통되는 이른바 ‘젠더 감수성’이라는 개념에 준하는 ‘착취 감수성’ 같은 게 존재한다면, 그런 감수성이 예민한 이는 미세먼지 때문이 아니라 우리 삶의 거의 모든 영역이 착취를 동반한다는 사실 때문에 숨을 쉴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의 경우 산업화 이후 겨우 수십년 유지된 쾌적한 삶의 방식이 얼마나 많은 숨은 비용을 치러왔는지를 셈해본다면, 그리고 이 셈을 전지구적 차원으로 확장해본다면, 미세먼지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지도 모를 일이다.
이슈미세먼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