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산문 <독자의 미신적인 윤리>는 ‘문체의 미신’에 관해 이야기하는 글이다. 사람들은 비유나 기교처럼 겉으로 드러난 작가의 솜씨가 곧 문체를 결정한다는 ‘미신’에 빠져서 훌륭한 책이라면 모두 문체 곧 기교가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잘못됐다는 것은 스페인어권 최고 문학작품으로 꼽히는 <돈키호테> 몇 줄만 읽어보면 된다. 보르헤스가 보기에 <돈키호테>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문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심리 통찰에 있다. 보르헤스는 ‘완벽한 글’과 ‘불멸의 글’을 나누어 대비시킨다. 완벽한 글은 단어 하나만 고쳐도 그 전체가 무너지는 글이어서 다른 언어로 번역하면 뉘앙스가 사라진다. 반대로 “불멸의 운명을 타고난 글은 오탈자·오역·오독·몰이해의 불길을 통과하며, 갖은 시련에도 영혼을 방기하지 않는다.” 불멸의 글은 전압이 극히 높은 전류와 같아 부실한 매체를 뚫고 흐른다. 독자를 감전시키는 것은 문체가 아니라 혼이다.
말의 경우는 어떨까. 말로써 재앙을 부른 아돌프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세상을 만들어온 힘은 ‘글’이 아니라 ‘말’이었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서양 정신사의 토대에 놓인 플라톤의 작품이나 기독교 성서가 글로 돼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히틀러의 주장을 수긍하긴 어렵다. 연설문의 경우는 어떨까. 말일까, 글일까. 연설 현장에서 쓰인다는 점에서는 말이라고 할 수 있고 대본 자체로 읽힌다는 점에서는 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디에 속하든 불멸의 글과 완벽한 글이라는 보르헤스의 구분에 연설문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이 4·3 70돌 추념식에서 읽은 ‘4·3 추념사’나 지난해 5·18 기념식에서 읽은 ‘5·18 기념사’가 긴 감동과 울림을 주는 것은 문장이 완벽하기 때문이 아니라 글에 혼이 살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체의 생명은 혼이다.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