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수
논설위원실장
최근 불거진 일련의 이슈들은 평소라면 선거를 코앞에 둔 여당엔 치명적 악재가 될 수 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수행비서의 미투 폭로로 사퇴한 건, 역대 선거에서 여야 표차가 크지 않은 충청권엔 위험한 신호다. 김기식 전 금융감독원장 사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어쨌든 야당 표를 결집하고 여당 표를 이완시키는 좋은 소재다. 여기에 최대 격전지 부산·경남 선거의 선봉에 선 김경수 경남지사 후보는 난데없는 ‘드루킹 의혹’에 휘말려 곤욕을 치르고 있다.
예전 같으면 ‘선거 어떻게 치르냐’는 한탄이 나올 법한데, 정작 여권은 조용하다. 민주당의 한 초선 의원은 “(당내에선) 그리 악재로 생각하는 거 같지 않다”고 말했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김기식 전 의원의 ‘후원금 셀프 기부’ 위법성을 왜 사전에 알지 못했느냐는 질문에 “그건 고위공직자 인사검증 항목에 들어 있지 않다”는 말로 넘어갔다. 위기감이 묻어나진 않는다.
긴장감을 찾기 어려운 이유는 자명하다. 대통령 지지율이 높기 때문이다. 70%를 넘나드는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라면 어떤 악재라도 탱크처럼 깔아뭉개면서 앞으로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당은 탱크 뒤의 보병처럼 그저 따라만 갈 뿐이다. 그에 비해 야당은 지리멸렬하기 짝이 없다. 보수정권 9년의 참담한 실패가 국민 기억에 또렷한데, 제1야당은 새로운 길을 모색하긴커녕 오히려 이명박-박근혜 세력에 기대 한줌의 지분이라도 지키겠다고 발버둥친다. 이런 식이라면 야당의 선거 승리는 10년은커녕 20년이 지나도 불가능할 듯싶다.
그러나 선거만큼 예측하기 어려운 건 없다. 평소엔 실체를 확인하기 어려운 ‘민심’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는 단 하나의 계기가 바로 ‘선거’다. 과거 수많은 언론과 정치평론가들의 선거 예측이 여지없이 틀리는 사례를 우리는 숱하게 목격했다. 이번 지방선거가 그런 경험의 반복이 되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대통령의 인기가 언제까지나 높을 순 없고, 야당이 영원히 바닥을 치지 않으리란 건 분명하다.
야당의 취약함에 기댄 선거는 언젠가 깨질 것이고, 그것이 꼭 이번 지방선거가 아니더라도 2020년 총선 또는 그다음의 대통령선거일 수 있다. 그런데도 요즘 청와대와 민주당에서 나오는 대응과 발언들은 너무 ‘내부 논리’에 빠져 있고, ‘단기 대응’만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래선 촛불 광장의 사회변혁 요구를 제도화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진보 집권 기간을 갖기가 쉽진 않을 것이다.
바로 지금이 현 정권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1961년 4월, 대통령에 취임한 지 3개월밖에 안 된 존 에프 케네디는 미 중앙정보국(CIA)의 쿠바 피그만 침공 계획을 덜컥 승인했다. 케네디 정부 핵심 인사들은 모두 최면에 걸린 듯 카스트로 혁명정부를 쉽게 전복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대통령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은 이 작전의 무모함을 지적하는 아서 슐레진저 특보를 ‘대통령에 반대하지 말라’고 윽박질렀다. 슐레진저는 목소리를 죽였고, 침공작전은 완벽한 실패로 끝났다.
케네디 대통령은 이 사건 이후 ‘집단사고’(Group Think)를 막기 위해 백악관 회의 방식을 바꿨다. 이런 변화가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핵전쟁을 피하는 데 도움을 줬다. 로버트 케네디는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룬 회고록 <13일>에서 “우리는 토론하고, 논쟁하고, 서로 의견이 엇갈리면 더 토론했다. 그런 방식이 최종 결론을 내리는 데 필수적이었다”고 썼다. 피그만의 실패 경험이 없었다면, 케네디는 훨씬 심각한 위기를 잘 넘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김기식 금감원장 사퇴와 드루킹 사건을 일종의 예방주사로 여겨야 한다. 이걸 ‘기득권층 반발’로만 보는 건 대응이 단순하고 마음도 편할 수 있지만, 기득권층 반발을 실질적으로 무력화하는 데엔 큰 도움이 되질 못한다. 이참에 정부여당 내부의 긴장감을 높이고, 대통령 지지율에 기대 흐트러졌던 자세를 다잡는 게 필요하다.
대통령만 모든 전선의 맨 앞에 설 게 아니라, 장관들이 나서 정책 이슈를 주도해야 한다. 국민 피부에 와닿는 정책을 내놓고 언론과 단체, 시민사회와 토론하고 설득해야 한다. 결국 지지율을 장기적으로 떠받치는 건 정책의 성공이다. 남북문제뿐 아니라 교육·일자리 같은 정책에서 국민 마음을 사로잡으면, 비록 게이트가 터져도 대통령에 대한 믿음은 쉽게 추락하지 않는다.
pc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