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철
논설위원
올해 초 미국에서 발간돼 논란을 일으킨 책 <화염과 분노>에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외교나 정책엔 깜깜이이고 변덕꾸러기에 난독증, 허풍쟁이 정도로 묘사돼 있다. 백악관 국가경제위원장을 그만둔 게리 콘이 주변에 보냈다는 이메일은 이렇다.
“트럼프는 아무것도 읽지 않아. 한 장짜리 메모도, 짤막한 정책브리핑도. 그는 세계 지도자들과 만날 때 중간에 일어나. 지루하기 때문이지.”
트럼프는 ‘한 시간 만나면 54분을 혼자 떠드는데’ 한 말을 되풀이한다. 최근 쫓겨난 맥매스터는 장군답게 피티하며 가르치려 들다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다. 밑도 끝도 없이 아부하거나 확실히 꿇는 사람, 통 크게 대가를 제시하는 사람과는 ‘거래’를 한다. 사우디의 젊은 왕세자는 3500억달러 무기 구매로 거래했고, 이집트 대통령은 “불가능한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고 아첨했다.
한반도의 봄이 외교 문외한 트럼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건 역사의 아이러니다. 한반도에선 트럼프와 김정은이라는 초현실적 지도자들을 통해 역사가 관철되는 중이다.
초현실적 한반도의 봄엔 현실을 뛰어넘는 상상력과 창의력이 필요하다. 과거를 단숨에 넘어서는 비약이 필요하다. 접근법은 두괄식·톱다운일 테지만, 과거 실패들을 하나하나 테이블에 올려놓고 그 뿌리를 뽑는 촘촘함이 곁들여져야 한다.
남과 북의 정상이 지금 왜 만나는가? 지금처럼 살면 양쪽 모두 불행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비상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두 체제 모두 일종의 벽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빌리 브란트가 동방정책을 편 1970년대 초 서독은 라인강의 기적 이후 성장률이 빠지면서 정체했다. 서독은 동구와 러시아로 가는 동방정책으로 활로를 모색했다. 우리 경제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성장률이 5%대 이하로 떨어졌다. 디제이의 햇볕정책은 경제 활로를 찾는 모색이기도 했다. 우리도 이제 더 늦기 전에 분단 70년간 갇혀 있던 섬에서 벗어나 북으로, 대륙으로 가야 한다.
김정은의 북한은 더욱 절실한 체제 한계에 봉착해 있다. 중국은 개혁개방 한 지 40년, 베트남은 30년이 됐다. 쿠바도 2015년 미국과 수교했다. 이란도 서방과 어찌됐든 핵 합의를 도출했다. 국제적으로 핵 일변도 노선을 관철할 토대가 없다. 내적으로도 외국 물 먹은 김정은이 김정일의 선군정치를 지속하기엔 무리다. 김정은이 무슨 대단한 전략전술가여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체제 한계로 대화로 나섰을 뿐이다.
남북 정상은 이번에 어떻게든 함께 잘 사는 공동체로 가는 밑돌을 놓아야 한다. 전쟁이 아닌 평화의 길을 닦아야 한다. 남북을 넘어 남-북-미, 나아가 동북아 6국을 포괄하는 그랜드 디자인을 내놓아야 한다.
한반도 드라마의 핵심은 북-미 담판이다. 백인 우월주의, 자국 우선주의에 기반한 ‘트럼피즘’은 오바마나 공화당 주류와는 정반대로 한다는 것이다. 이란 합의는 깨고 북한과는 매듭을 지으려 할 것이다. 트럼프도 혼란의 1년을 지나며 안정감을 찾고 있다. 노련한 폼페이오나 볼턴의 합류는 일관성 측면에선 긍정적이다.
남-북-미가 일련의 회담을 통해 서로 원하는 목록을 꺼내놓고 빅딜을 해야 한다. 장사꾼 트럼프는 백악관에서 자주 “큰 거, 우리는 큰 게 필요해”라고 말했다고 한다. ‘같이 문제를 풀어보자’는 트럼프 방식은 상대가 내 등을 긁어주면 나도 상대방 등을 긁어준다는 것이다. 주고받기의 달인 트럼프는 거래를 반긴다. 한반도의 봄이 기이한 미국 대통령 손에 달려 있는 모양새지만, 역설적으로 트럼프는 위기인 동시에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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