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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2030 잠금해제] 더는 빨갛지 않은 빨갱이 / 이은지

등록 2018-05-06 22:14수정 2018-05-06 22:21

이은지
문학평론가

지난 2일 경남 창원에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내뱉은 빨갱이 관련 발언을 놓고 비난이 거세다. 해당 발언이 논란이 되자 경상도에서는 반대 의견만 내는 사람을 빨갱이라고 지칭한다며 근거 없는 해명을 하여 빈축을 사기도 했다. 경상도 출신인 나조차도 금시초문인 변명에 헛웃음이 나오는 와중에 새삼스러운 것은, 빨갱이라는 단어가 바야흐로 사멸해간다는 사실이었다.

각국 정상들이 파워게임을 동반하며 남북의 화해를 운위하는 이 시점에 빨갱이라는 단어가 무의미하게 들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냉전시대에는 누구에게나 서늘하게 들렸을 저 단어의 위력이 퇴색하는 것은 비단 시대가 변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소위 종북 담론을 무력화시키는 세월을 이 사회의 구성원들이 아프게 살아내지 않았다면, 정세가 변한다 한들 색깔론이 촌극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빨갱이라는 단어는 더는 빨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민주시민의 승리를 가리킨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단어의 본질이 변해버린 셈이다.

예컨대 나의 경우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광주사태’로 지칭하는 것에 오랫동안 익숙해 있다가 이 단어의 불온함을 알게 되면서 쓰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데, 그럼에도 광주를 이야기할 때면 부지중에 광주사태를 말하고 자책하는 과정을 반복하곤 한다. 이때 광주사태라는 네 음절 또한 단순히 80년 5월 광주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무심하게 쓰던 단어를 쓰지 않으려는 고투는 그 단어의 의미와 그것을 구성하는 가치체계에 도전하는 헤게모니 싸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조갑상의 <병산읍지 편찬약사>는 그런 측면에서 흥미로운 작품이다. 병산읍지의 필자인 이 교수는 보도연맹에 가입되어 좌익사범으로 구금된 양민들을 병산 지서장이 풀어준 일화를 자세히 구술하나, 정치적으로 편향적이라는 편찬위의 제동으로 해당 부분을 어쩔 수 없이 고쳐 쓰게 된다. “그어진 연필 줄이 자기 몸을 그은 칼자국 같”이 고통스러운 수정 작업보다 당혹스러운 것은 어디를 어떻게 고치고 지워야 할지를 본능적으로 아는 자신의 손이다.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을 “마음보다 손이 성급하게” 지우는 자신에 놀란 그는 수정을 포기하고 만다.

이 교수에게 문장 하나 단어 하나를 고치고 지우는 작업은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과 대결하는 살벌한 전쟁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단어에는 그것을 둘러싼 이해관계와 현실감각이 복잡하게 연루되어 있다. 수구세력의 주적이자 핵심 동력원이었을 빨갱이는 그들이 세계를 어떻게 감각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빨갱이라는 단어를 무력화시키는 것은 이 단어가 작동하는 세계관을 무너뜨리는 과정이기도 하다. 당내에서 홍준표가 비난받는 까닭도 그가 이 과정에 한몫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전혀 다른 움직임도 있다. 대한항공 촛불집회 주최자는 그 집회가 정치 단체와 무관하게 직원들만의 힘으로 열린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이러한 선긋기는 지난 광화문 촛불집회뿐 아니라 대학 내 운동권 학생회에 대한 대학생들의 반감을 통해서도 확인되는 현상이다. 이렇듯 빨갱이가 실체 없는 허울이어서뿐만 아니라, 빨갱이라는 잘못된 규정에 속하지 않으려는 의식적인 탈주를 통해서도 빨갱이는 사멸하고 있다. 여기에는 수구세력으로만 한정할 수 없는, 보다 넓은 범위의 기성세대를 향한 염증과 환멸이 작용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빨갱이가 더는 빨갛지 않게 되어가는 현상을 좀 더 섬세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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