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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 읽기] 법률가들이 대법원 앞에서 농성을 하는 이유 / 홍성수

등록 2018-06-10 18:27수정 2018-06-11 13:29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

사법에 관한 강의를 하다 보면, 법관이 자신을 임명한 대통령의 뜻에 따라 재판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일반 대중들은 물론이고, 법을 전공하는 대학생들도 마찬가지다. 그럴 때마다 나는 늘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고 말한다. 판결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며 인과관계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그걸 규명하는 일이 쉽지 않음을 강조한다.

법관이 사법연수원이나 로스쿨에서 학습한 논리규칙에 따라 자동판매기처럼 판결을 찍어낸다는 이론은 이미 파산했다. 그래서 세계의 법연구자들은 법관의 정치적 성향, 개인적 성격, 인생 경험 등이 재판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법관을 합리적 행위자로 전제한 뒤, 소득, 여가, 권력, 명예, 평판, 자존감, 일의 만족감 등이 법관의 행태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기도 한다. 법관의 성별이나 인종적 배경이 판결에 미치는 영향은 물론이고, 딸이 있는 판사가 여성 관련 사건에 어떤 판결을 내렸는지를 조사한 연구도 있다.

이런 연구는 법관이 독립적으로 재판한다는 사실을 전제한 것이다. 노골적으로 뇌물을 받거나 권력자들과 ‘재판 거래’를 하는 경우는 없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실제 판결에 미치는 다양하고 복잡한 요인들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는 것이다. 물론 정치적인 영향의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임명권자의 정치적 성향이 최고 법원 판사의 판결에 주는 영향은 오래된 연구 주제 중 하나다.

실제로 한국에서도 보수정권이 임명한 대법원장이 사법행정권을 발동하여 사법부를 보수화한다는 비판이 있었다. 또한 개별 판사가 승진이나 좋은 근무지 배치를 노리고 정치권력이나 그들이 임명한 최고 법원 판사들의 눈치를 본다는 연구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정치가 사법과 연결되어 있으며 간접적인 영향권 아래 있다는 점을 착목한 것일 뿐, 사법부가 특정 정치세력과 직접 의견을 주고받거나 거래를 한다는 것은 논외의 문제다.

법조 실무가들도 마찬가지다. 소송 당사자들은 종종 “청와대가 법원에 압력을 넣지 않을까요?”라고 묻는다. 그럴 때마다 대부분의 변호사들은 “그런 일은 없다”고 단호하게 답한다. 지독한 편견에 사로잡혀 재판을 진행하거나, 고루한 관념을 시대정신이라도 되는 양 판결문에 버젓이 적어 넣는 판사는 있어도, 판사가 청와대와 재판을 놓고 직접 흥정을 하는 일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신뢰 아래 그들은 법정에서 판사와 마주해왔다.

이것이 사법부에 대한 법조계나 학계의 최소한의 신뢰였다. 하지만 대법원 특별조사단의 보고서의 내용은 이 모든 가정을 뒤집어 버렸다. 법원행정처가 노골적으로 특정 판사의 개인 신상을 조사하여 기록했고, 통합진보당 사건, 통상임금 사건, 케이티엑스(KTX) 승무원 사건 등에서 청와대의 의견을 주고받고 조율하려고 했던 정황이 드러난 것이다.

그동안 변호사들은 최선을 다해 증거를 찾고 논리를 만들어 법관을 설득하는 데 최선을 다해왔고, 학자들은 판결문 한 글자 한 글자에 담긴 의미를 찾기 위해 동서고금의 사상을 동원해 숙고를 거듭했다. 대중들이 사법부의 실상을 잘 모른다며, ‘법원이 생각보다 믿을 만한 곳’임을 애써 강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그들도 등을 돌렸다. 분노와 배신감, 참담한 심정을 감추지 않는다.

그동안 사법부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를 전제하고 강의해왔던 나 자신도 다음 학기에는 무슨 얘기부터 꺼내야 할지 암담하다. 보다 못한 법학자들과 변호사들이 본업을 제쳐두고 대법원 앞에서 천막농성을 시작했다. 사법부의 ‘우군’들은 이리도 절박한데, 정작 사법부는 그리 절박해 보이지 않는다. 그 인식 차이가 사태를 이 지경까지 몰고 왔던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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