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제 나라에서 살고 있으면 내국인이고 나라를 떠나면 외국인이 된다. 그러니 똑같은 사람이 서 있는 장소에 따라 그 명칭이 달라지는 셈이다. 대화를 하다가 ‘나’가 ‘너’가 되기도 하고 ‘너’가 ‘나’가 되기도 하듯이 말이다. 일종의 대명사 같은 용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휘 자체가 아니라 일정한 공간적 자리매김에 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 다녀온 사람의 이야기다. 로스앤젤레스 시내의 한 카페에 한국인 유학생들이 모여서 왁자지껄하고 있었다고 한다. 한참 떠들다가 그중 하나가 “야, 여기 외국인들도 많은데 우리가 너무 시끄럽게 굴었다. 창피하니까 좀 조용히 하자” 하더란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엄밀하게 말한다면 사실 그 유학생들 자신이 외국인들이고 그 주변 사람들이 내국인이다. 우리는 혹시 말이 잘 통하면 ‘우리’, 잘 안 통하면 ‘외국인’, 이렇게 딱지를 붙이며 살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외국인이라는 말 자체가 불필요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왜 일상적으로 ‘국적’에 신경을 써야 하는가 하는 의문도 있다. 과거에는 외국인을 특별한 사람으로 여기기도 했다. 그들은 뭔가 있어 보였고 우리는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와 ‘그들’의 차이가 점점 흐릿해진다. 세계화의 일정한 단계에 들어선 요즘은 국경 너머의 문제가 갑자기 닥쳐와 우리 문제가 되기도 한다. 경제 위기, 증오와 갈등, 심지어 초미세먼지까지 바깥의 문제이자 우리의 문제가 되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외국인이냐 내국인이냐 하는 것보다는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 문제’로 세상을 보는 것이 더 올바른 태도가 아닐까 한다. 이제는 우리들만의 세계도 없고 우리를 빼놓는 세계도 있을 수 없다. 곧 우리가 세계이고 세계가 우리인 셈이다. 우리의 문제와 세계의 문제를 하나의 틀에서 보는 눈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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