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철
논설위원
2016~2017년 서울 광화문광장을 밝혔던 ‘촛불’의 요구는 대략 세가지로 압축된다. 1. 단죄(구체제 척결) 2. 민생(격차 해소) 3. 개혁(정치구조 쇄신)이 그것이다. 6·13 지방선거를 기점으로 촛불혁명은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고, 이들 세 요구를 실현하는 길도 새롭게 모색해야 할 상황이 됐다. 지금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촛불, 이른바 ‘촛불혁명 시즌 2’를 준비할 때다.
2016년 12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민들이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촛불 파도타기를 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지방선거를 통해 진보는 정점에 섰고, 보수는 바닥을 쳤다. 진보는 내려가는 길이, 보수는 올라가는 길이 남았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총선·대선의 결과는 보수가 얼마나 혁신하는지, 진보가 얼마나 실력을 발휘하는지에 따라 매우 가변적이다.
이제는 촛불 1기를 결산하고 촛불의 새 국면을 개척할 때다. 1기가 질풍노도의 시기였다면, 2기는 보다 성숙하고 알맹이 있게 발전해야 한다. 좌, 우의 협공에 밀려 길을 잃었던 참여정부의 전철을 촛불이 되풀이해선 안 된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미래지향적 단죄와 청산을 고민해야 한다. 미래지향적 청산이란 나라다운 나라에 걸맞은 기준을 세우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을 놓고 ‘자유민주주의냐 민주주의냐’를 정권 따라 반복할 게 아니라, 둘을 포괄하는 기준을 만들거나 기준 자체의 존폐를 고민해야 한다. 마구 내달리다 어느 순간 그만하자는 식이 아니라 차분히 끝까지 파헤쳐, 미래의 교훈으로 남기는 청산이 돼야 한다.
큰 두목은 엄벌하되, 아랫사람은 관용하는 통합적 청산이 돼야 한다.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은 끝까지 책임을 묻되 아랫사람들은 경중에 따라 관용하는 걸 고민해야 한다. 최근의 사법농단, 기무사 계엄령 문건 역시 진실은 밝히되 처벌은 최고 책임자들로 최소화하는 게 좋다. 사람을 내치는 게 아니라 저변을 확대하는 청산이 필요하다.
둘째, ‘좌측 깜빡이 켜고 우회전하는’ 식의 투항적 정책노선 변화는 금물이다. 촛불의 최대 요구는 격차 해소이고 포용적 성장, 소득주도성장은 이를 위한 목표다. 이를 뒷전으로 밀쳐놓으면 ‘촛불정부’라 할 수 없다. 다만, 목표를 위한 수단은 유연하고 폭넓게 고려해야 한다. 최저임금 1만원은 수단이지 목표는 아니었다.
격차 해소를 위한 모든 방안을 원점에서 강구해야 한다. 기본소득, 포괄적 증세, 획기적 복지국가, 과감한 재정 등 왼쪽 방안들을 애써 피할 이유는 없다. 현실에서 작동할 수 있다면 과감히 밀어붙이는 것도 방법이다. 은산분리, 개인정보 보호 완화 등 오른쪽 방안들에 대해선 그동안 혹 정책적 도그마에 빠졌던 건 아닌지 살펴봤으면 한다. 격차 해소라는 대원칙에 부합한다면 이념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방안을 쏟아부어야 한다.
셋째, 지금이야말로 정치의 틀을 바꿀 때다. 여세를 몰아 정치개혁에 나서야 한다. 선거에 연달아 승리했다고 ‘이대로 가면 되겠지’ 하다 보면 다음엔 어려워질 수 있다. 보수가 혁신하고 진보정당이 세를 불리는 지금이 정치를 쇄신할 절호의 기회다.
연내에 개헌과 선거구제 개편의 대강을 마무리한다는 자세로 접근했으면 한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극복하고 정치구조를 선진화하는 것은 촛불의 3대 요구 중 하나다. 민생이 급하지만, 이를 미뤄선 안 된다.
독일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는 “다수는 중도에서 좌측 방향으로 위치한다”는 말을 남겼다. 촛불 2기를 맞으며 새겨볼 만하다. 진보적 가치를 지향하되, 발은 굳건히 현실 한가운데 서야 한다. 그래야 협공을 물리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유연한 개혁, 성숙한 청산, 삶에 기반한 민생으로 촛불 2기를 밝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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