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철
논설위원
지난주 문재인 대통령과 5당 원내대표 회동은 그림이 괜찮았다.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늠름해 보였다. 문득 ‘홍준표가 없으니 정치가 이렇게 달라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회동은 지방선거 이후 달라진 정치 기상도를 보여준다. 이른바 ‘협치 시대’의 예고편일 수 있다.
협치의 조건은 제법 무르익었다. 시기적으로 내년엔 선거가 없다. 작품을 만든다면 올가을부터 내년 봄까지 정도다. 여야 ‘올드보이’들의 귀환은 협치에 나쁘진 않다. 신선감은 없지만 일단 서로 얘기가 된다. 문 대통령이 조금씩 혼자로는 힘이 부치는 것도 중요한 조건 중 하나다.
협치의 방향은 이미 나와 있다. 남북 문제와 선거제만 해내도 대성공이다. 국가적으로 올 하반기는 결정적 시기다. 9월 평양 정상회담으로 남북 공존의 토대를 쌓을 수 있을지, 선거제 개편으로 정치 쇄신의 밑돌을 놓을지가 판가름난다. 두 과제의 성공을 위해선 협치가 필요하다.
이번 평양 정상회담에선 주요 분야에서 돌파구를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합의의 지속성, 실천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김대중·노무현 두 대통령의 평양 방문은 합의가 상당 부분 현실화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쉬운 대목이다. 거기엔 북한의 변심, 미국의 훼방 외에도 남한 내 합의 부재도 한몫했다. 세번째 평양 회담은 달라야 한다.
남북 평화공존의 토대 중 하나는 대북정책이 일정 기간 지속될 수 있는 안전판을 마련하는 일이다. 통독 과정에서 자유당 겐셔 외상은 사민당, 기민당과의 연정에 연달아 참여해 동방정책을 이어갔다. 우리도 대북정책의 공통분모를 마련할 최소한의 인적·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여야정 협의체에 대북정책협의회 같은 걸 두거나, ‘협치 장관’을 두어 대북정책 등을 조율하도록 하면 어떤가. 아예 통일부나 외교부 장관을 통크게 야당에 할애해 ‘외교안보 협치 내각’을 꾸리면 어떨까.
보수 야당도 남북 문제를 깊이 고민해야 한다. 야당의 집권 여부는 이 문제에서 국민과 얼마나 눈높이를 맞추느냐에 상당 부분 달려 있다.
또 다른 협치의 길은 정치 패러다임을 바꾸는 일이다. 대통령 혼자 우뚝 서고 나머지는 일곱 난쟁이들처럼 주변을 맴도는 구조로 제대로 된 정치는 어렵다. 역대 대통령들은 야당이 국회에서 안 도와줘 못 해먹겠다는 푸념을 달고 살았다. 이는 부분적으로만 맞다. 대통령이 먼저 손을 내밀고, 야당을 ‘진짜 파트너’로 대우해야 한다. 그래도 야당이 반대만 하면 국민이 심판한다.
선거제와 개헌을 대통령이 꼭 틀어쥘 필요는 없어 보인다. 문 대통령이 큰 틀에서 이를 정치권에 맡기면 어떤가. 여의도에도 경륜과 지혜를 갖춘 이들이 제법 있고, 정치판 모양새는 작품을 만들 수도 있어 보인다. 정치인들이 나눠먹으려 들면 국민이 가만있지 않는다. 대통령은 국민 이익의 최후 보루로서 역할을 하면 된다.
협치는 2기 문재인 정부의 새 동력이 될 수도 있다. 풀리지 않는 문제는 우회하는 것도 방법이다. 최대 난제로 떠오른 민생에만 매달린다고 문제가 곧 풀리진 않는다. 남북 문제와 정치개혁은 물론 민생까지 협치를 통해 진지하게 접근하다 보면 의외로 사정이 나아질 수 있다.
촛불은 나라의 운명을 개척하는 동력이자 기반이다. 문 대통령이 북핵 국면에서 나름 역할을 한 것도 촛불의 저력에 힘입은 바 크다. 촛불은 산업화·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우리 국력의 총화다. 촛불에 걸맞은 평화와 정치 선진화는 지금 시기 최대의 국가적 과제다. 그리로 가는 유력한 길이 협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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