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가 독주한다’는 비판이 부쩍 많아졌다. 문재인 정권 초기부터 청와대에 ‘힘을 빼라’고 외쳤던 보수 야당·언론은 물론이고, 요즘은 진보 진영에서도 청와대의 국정운영 방식을 우려스럽게 지적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직접 배경은 대통령 지지율의 하락일 것이다. 청와대가 ‘독주’하더라도 국민 지지만 높다면 비판은 쉽지 않다. “민심을 얻으면 못할 게 없고, 민심을 잃으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에이브러햄 링컨의 말은 대중민주주의 본질을 잘 드러낸다.
지지율이 떨어지는 순간, 상황은 달라진다. 모든 잘못이 대통령과 청와대에 있다는 식의 비판이 쏟아진다. 이건 정치제도로서 대통령제의 운명이겠지만, 갈수록 양극화가 심해지는 현대 정치의 당파성과도 관련이 깊다. ‘국민 모두의 대통령’은 한국이나 미국이나 전세계 어디에도 이젠 존재하지 않는다.
‘청와대 권력집중’을 걱정하는 얘기가 넘쳐나는 데엔 박근혜 정권의 실패가 한몫 했을 터이다. 헌법을 뛰어넘어 권력을 행사했던 박 전 대통령 사례는 제왕적 대통령의 극복을 ‘절대 선’인 것처럼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요즘 새로 드러난 사실로만 봐도 박근혜 전 대통령은 대법원과 ‘재판 거래’를 시도했을 정도로 삼권 분립과 대의민주주의를 심각하게 훼손했다. 아무리 가혹하게 평가해도, 지금의 청와대가 민주주의 기본 원리를 저버리면서까지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고 보긴 어렵다.
또하나의 비판은 좀더 현실적이고 날카롭다. ‘청와대가 내각 위에 군림한다’는 지적이다. 청와대 참모들이 설쳐서 내각의 장관들이 소신껏 일을 할 수 없고, 그 결과 경제를 비롯한 주요 정책이 혼선과 표류를 거듭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최저임금 파동과 일자리 쇼크 등이 청와대-부처 갈등 속에 나타난 대표적 사례로 거론된다. 지난주 발표된 대입제도 개편안을 두고 진보적 교육단체들이 교육부 대신에 청와대 사회수석실을 비판의 표적으로 삼은 것도 그런 상징적 장면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제 아래서 청와대가 주요 정책의 방향을 정하는 게 잘못된 일일까.
최근 일련의 정책 난맥은 청와대의 ‘군림’ 탓이라기 보다, 오히려 ‘국정운영 사령탑’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데 근본 이유가 있다. 정책 조율을 주도하고, 일관된 메시지를 국민에게 던지는 게 청와대의 할 일이다. 정책 집행은 부처의 몫이나, 정책 기획과 조정은 대통령실이 해야 한다. 그런데 ‘박근혜 청와대’의 경험과 이에 대한 검찰의 맹렬한 수사가 현 청와대의 행동 반경을 좁혀버린 것처럼 보인다. 역대 정부에선 정례화하다시피 했던 경제정책 조정을 위한 청와대 회의가 현 정부 들어 제대로 열렸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대통령의 높은 지지율 뒤로 숨어버린 건, 장관 뿐 아니라 청와대 참모들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야당조차 ‘이 정권의 성공을 바라지만…’이라고 말한다. 그 때 ‘정권의 성공’ 또는 ‘대통령의 성공’이 뜻하는 건 명확하다. 대통령의 지향과 가치를 정책에 구현해서 국민 지지를 받는 게 ‘성공’일 것이다. 이 때 가장 중요한 건 행정부 전체에 대통령의 가치를 투영하고 함께 그 방향으로 나가도록 조직화하는 일이다.
‘강한 청와대’가 내각의 약화를 뜻하진 않는다. 주요 정책의 최전선에서 국민과 대화하고 비판세력을 설득하는 건 장관의 몫이다. 장관들이 대통령의 가치와 정책 지향을 온전히 공유할 때 ‘성공한 정권’의 가능성은 훨씬 높아진다.
대통령제에 치명적 불신을 안긴 1974년의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집권한 지미 카터(민주)는 권력 남용의 오해를 피하려 대통령 비서실장을 두지 않았다. 그렇게 대통령실 역할을 축소한 게 성공적이지 못했음은 1980년의 재선 실패로 드러났다. 카터를 반면교사로 삼은 로널드 레이건(공화)이 미국 역사상 가장 성공한 대통령 중 한사람으로 평가받는 건 의미심장하다. 레이건은 각료들에게 권한을 줬지만, 그 권한이 항상 ‘레이건 정권의 가치와 기조’를 벗어나지 않도록 다잡았다. 그런 방향을 잡는 역할을 백악관 참모들이 수행했다.
‘지지율’이란 안개가 걷히면 냉정하고 힘든 현실이 눈 앞에 드러난다. 그 현실을 헤쳐나갈 중심은 대통령실일 수밖에 없다. 청와대 참모들이 앞장서 부처를 독려하고, 하나의 목소리로 국민에게 믿음을 주는 게 필요하다. ‘군림하는 청와대’란 비판에 움츠러드는 순간, 난마처럼 얽힌 현안 해결은 더 어려워진다.
박찬수 논설위원실장pc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