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철
논설위원
10월의 어느 날 백범 김구 선생 묘소를 찾았다.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한켠, 양지바른 곳에 백범이 고즈넉이 누워 있다. 햇살은 눈부시지만 묘역은 왠지 쓸쓸하다. 생전의 삶이 그랬듯 백범은 죽어서도 속세의 연들에 얽혀 고단한 몸을 누이고 있는 듯하다. 백범 곁에 서서 하늘을 보니 서글프도록 시리고 푸르다.
효창공원은 내가 속한 한겨레신문사에서 제법 가깝다. 틈나면 거닐며 머리를 식히곤 한다. 부끄러운 고백 같지만, 백범 묘소를 맘먹고 둘러본 건 올해 들어서다.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삼의사 묘도 마찬가지다. 올해 초 우연히 서울 선릉을 갔다가 봉분들이 외진 곳에 감추듯 철책이 쳐진 채로 있는 걸 보고 백범 묘를 찾았는데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전경. 백범 김구와 삼의사의 묘 앞에 효창운동장이 들어서 있다. 효창운동장 옆의 큰 건물이 백범기념관, 바로 그 옆이 백범 묘역이다. 백범 묘역 왼쪽에 의열사, 삼의사 묘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백범 묘역 뒤편 양쪽에 반공기념탑과 대한노인회 건물이 보인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백범을 제대로 못 모시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원은 꾸준히 가꾸어 괜찮은 휴식공간이 됐지만, 백범과 삼의사는 철책에 갇혀 외로이 잊히고 있었다. 시민들이 백범의 숨결을 느끼며 호젓이 공원을 거닐고, 젊은이들이 백범 곁에서 파란 하늘을 보며 호연지기를 키울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보니 백범 무덤이 쓸쓸한 건 정치적 곡절이 있었다.(<한겨레> 5월31일치 1면
‘김구 등 7명 잠든 효창공원, 독립운동 성지로’ 참조) 이승만 대통령 시절 묘를 들어내고 운동장을 지으려다 반발이 거세자 무덤 앞에 효창운동장을 덩그러니 세웠다. 박정희 대통령 땐 묘소 뒤편에 반공기념탑과 대한노인회가 들어섰다.
반공기념탑은 백범 묘를 내려보듯 언덕 위에 서 있다. 백범은 남북의 단독정부에 반대해 끝까지 민족통일·자주독립을 외치다 흉탄에 쓰러졌다. 백범 뜻을 헤아렸다면 반공탑을 그렇게 세우진 못했을 것이다.
백범처럼 사람들 마음속에 담길 만한 풍성한 얘깃거리를 가진 지도자도 드물다. 명성황후 시해를 앙갚음하려 일본군 중위를 때려죽인 일은 최근 영화화됐다. 19살에 동학군 선봉장으로 해주성 공략에 나섰고, 탈옥 후엔 마곡사에서 머리 깎고 중이 됐다. 윤봉길·이봉창의 의거를 공모·지원하는 과정은 백미에 해당한다.
백범 곁에 묻힌 삼의사 행적을 좇다 보면 아련함이 밀려온다. 말 그대로 초개처럼 젊음을 조국에 바쳤다. 그들의 순정에 머리가 숙여질 뿐이다. 백범은 귀국 후 세 분 주검을 일본에서 모셔와 이곳에 묻었다. 안중근 의사도 주검을 찾으면 묻을 수 있도록 가묘를 그 옆에 두었다.
내년은 3·1운동 백돌, 상해 임시정부 백돌이다. ‘임정 주역’ 백범을 쓸쓸히 두고 백년을 기리는 건 민망하다. 서울시와 정부는 최근 효창공원 ‘독립공원화’에 대한 연구용역 절차에 들어갔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백범을 모셨으면 한다.
3·1운동 백년을 새롭게 새기는 일도 필요하다. 3·1운동은 단순한 저항을 넘어 세계평화와 자주독립의 큰 이념을 바탕으로 했다. 3·1운동 백년을 제대로 기리는 일은 나라 안팎에서 대결과 반목을 넘어 평화와 화해의 시대로 가는 것이다. 항일, 반일을 넘어 ‘극일’로 가는 것이다.
효창공원이 백범의 공원답게 넉넉하고 포근했으면 좋겠다. 효창운동장엔 주말이면 고교 축구리그에 참가한 학생들로 북적인다. 그들의 꿈도 소중하다. ‘성역화’한다고 마구 쓸어내고 위엄만 세우는 건 백범 뜻이 아닐 것이다. 공원 재정비의 핵심은 효창운동장 철거 여부라고 한다. 다른 곳에서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여의치 않다면 형편껏 다듬으면 된다.
백범의 기개가 서린 효창공원을 민족의 공원, 청춘의 공원, 멋스러운 시민의 공원으로 가꾸어보자.
kcbae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