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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말글살이] 물타기 어휘 / 김하수

등록 2018-10-21 21:11수정 2018-10-22 09:42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물을 탄다는 말은 ‘희석’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희석이란 낱말은 ‘물을 타서 농도를 옅게 한다’는 뜻으로 잘 쓰이고 있지만 ‘물타기’라는 말은 정작 물을 섞어 넣는 일에는 잘 안 쓰이고, 어떤 사안의 심각성을 얼버무리거나 중요한 것을 다른 사소한 문제들과 섞어버리는 것을 비판할 때 많이 쓰인다.

각종 부패 사건이 터지면 ‘무슨무슨 비리사건’과 같은 용어를 쓴다. ‘유치원 비리’ ‘채용 비리’ ‘공무원 비리’ 등에서 사용되는 비리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단순한 말이다. 누구든지 살다 보면 이치에 맞지 않게 실수도, 오해도 하며 지낸다. 그러나 우리가 분노하는 사건들은 그저 이치에 맞지 않는 정도가 아니고 참기 어렵고 분을 억누르지 못할 일이 대부분이다. 분명히 표현하자면 ‘부정한 일’ 아니면 ‘부패사건’인데 이런 것을 단순히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일종의 ‘물타기’가 아닌가?

예전에는 대개 ‘부정부패, 불법’ 등의 용어가 많이 쓰이다가 슬그머니 ‘부조리’라는 말도 꽤 유행했다. 부정부패라는 말이 나오면 수사 당국이 우물쭈물 시간을 보낼 수 없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부조리’라고 하면서 최고 관리자가 “책임을 통감한다”고 하며 고개만 숙이면 슬쩍 넘어가는 경우도 생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모두가 근본적으로는 ‘부패’와 ‘불법’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거칠고 딱딱한 어휘를 부드러운 말로 고쳐서 순화하는 일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옳지 않은 일, 분노를 살 만한 일에는 ‘공분’을 드러내는 표현이 더 중요하다. 유치원 비리가 아니라 ‘유치원 부정 회계’라든지 채용 비리가 아니라 ‘부정 채용’과 같이 사건의 본질을 명료하게 드러내고 사법 당국도 얼른 대응할 수 있는 분명한 표현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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