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 미국-멕시코 국경지대, 남미 카라반인 온두라스 여성이 기저귀를 찬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필사적으로 달린다. 뒤에선 구토와 눈물을 유발하는 최루탄 가스가 피어오른다. 미국 국경수비대에 비난이 쏟아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왜 부모가 최루가스가 퍼져 있는 걸 알면서 아이와 함께 그곳으로 달려가느냐”며 “아주 순한 최루가스”라고 했다. 프랑스 파리도 희뿌옇다. 유류세 인상에 항의하는 시위대에 경찰은 최루탄을 쏜다.
시위 진압에는 클로로아세토페논이라는 가스가 든 최루탄이 주로 쓰인다. 한때 클로로벤즈알말로노나이트릴 성분의 최루탄이 맹위를 떨쳤으나 폐 등에 손상을 준다는 비난에 따라 제한적으로 사용된다.
한국에선 거제도 포로수용소 폭동 진압에 최루탄이 처음 사용됐다고 한다. 독재정권 시절 최루탄은 일상이었다. 1960년 4월11일, 경남 마산 앞바다에서 17살 김주열의 주검이 떠올랐다.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혀 있었다.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혁명의 도화선이었다. 87년 6월9일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한달 가까이 신음하다 숨을 거뒀다. 총기 발사용 직격탄(SY-44), 수류탄 형태의 사과탄(KM-25), 페퍼포그 다연발탄인 ‘지랄탄’이 거리를 뒤덮었다. 얼마나 많이 쓰였던지, 최루탄 납품 독점권을 따낸 삼양화학공업 한영자 회장은 87년 한해 28억원의 소득세를 냈다. 재벌 총수들을 제치고 1위를 했다.
1998년 9월3일 만도기계 노사분쟁을 끝으로 시위 진압에서 최루탄은 사라졌다. 김대중 정부는 ‘최루탄 무사용’을 선언했다. 삼양화학공업도 2000년대 생산을 중단했다. 그러나 대광화공 등 4개 기업은 최루탄을 계속 만들었다. 바레인, 터키 등 10개국에 해마다 수백만발을 수출했는데, 국제문제로 비화하기도 했다. 2011~13년 바레인 ‘아랍의 봄’ 시위 때 39명이 최루탄에 목숨을 잃었는데, 앰네스티에 따르면 한국 업체들이 당시 150여만발을 바레인에 수출했다. 터키에도 2011~16년 387만발을 수출했다. 2014년 빵을 사러 간 14살 소년 베르킨 엘반이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자 터키 시민단체는 <뉴욕 타임스> 등에 반대 광고를 내고 한국을 비난했다. 수출 중단 요구가 빗발치자, 국내 한 업체는 터키에 생산라인을 세웠다. 최루탄 수출 반대운동을 펼쳐온 ‘전쟁 없는 세상’은 “여전히 국내업체들은 방위사업청에 최루탄 수출 허가를 요청한다”며 “수출 물량에 대한 집계조차 없는 실정”이라고 밝혔다.
신승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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