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승근
논설위원
대개 직접 전화를 받았다. 노무현 정부의 최고 실세였지만 기자들의 전화에 소관 업무를 충실히, 조곤조곤 설명했다. 업무 중 답을 못 하면 밤늦게 직접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 통화는 십여분을 훌쩍 넘기곤 했다.
이런 기억이 나를 적잖이 곤경에 빠뜨린다. “그건 옛날 문재인”이라는 사람들과 자주 부닥친다. 진정성을 변호하면 “보고도 모르느냐”고 타박한다. 몇몇 지인은 “어떻게 만든 정권인데…. 이대로 가면 결말이 보인다. 가슴이 미어진다”고 했다. “호되게 비판해 달라”는 주문도 많다. 모두 촛불혁명에 동참했고, 문재인 대통령을 찍은 사람들이다.
‘문재인 변호’는 지난 1일 국외 순방 중 전용기 기자간담회로 더욱 설득력을 잃었다. 뜻대로 안 풀리는 북핵 문제를 ‘김정은 연내 답방’으로 추동하려는 절박함은 이해할 수 있다. 그래도 국내 현안엔 답하지 않겠다며 직접 기자들의 말까지 자른 건 적잖은 충격이었다. ‘낮은 자세’로 소통하는 게 그의 가장 큰 매력이고 자산인데, 정말 낯설었다. 비정규직 노동자와의 격 없는 대화, 울먹이는 유족을 끌어안은 5·18 기념식…. 불통의 박근혜를 처절히 경험한 국민은 울컥했다. 정치적 반대자들도 감동했다. 사회 전체가 치유되는 듯한 느낌도 공유했다. 이젠 먼 과거 일 같다.
어느 순간부터 ‘불통’의 이미지가 덧씌워진다. 보수 언론의 교묘한 프레임, 야당의 공세 탓이 크다. 청와대 관계자도 억울함을 호소했다. 어느 대통령보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회의와 행사를 통해 끊임없이 소통한다는 것이다. 억울한 면도 없지 않다. 자초한 것도 적지 않다. 국무회의,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문 대통령의 메시지는 차고 넘친다. 그런데 하고 싶은 얘기, 지시만 많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최저임금 인상의 긍정적 효과가 90%” “자동차 생산이 다시 증가했고, 조선 분야도 1위를 탈환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는 말처럼…”이 대표적이다. 전용기의 ‘낯선 문재인’은 그렇게 서서히 변해온 ‘낮은 자세 문재인’일 수도 있다.
문재인대통령이 11일 오전 충남 세종시 정부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참석하여 모두발언을 마친뒤 새로 임명된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소개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한계효용 체감’ 탓도 있다. 감동 이벤트를 계속 만들기도 어렵지만 그조차 반복되면 그저 그런 ‘대통령 행사’가 된다. 사퇴 압박에도 자리를 지키던 탁현민 의전비서관실 선임행정관이 지난 6월 사의를 표명했을 때 청와대 관계자는 “더 새롭게 할 게 없다는 부담감 때문”이라고 했다. 실제 남북정상회담을 빼면, 올해는 지난해만큼 기억에 남는 감동적 명장면이 없다.
집권 2년 차, 그 자리를 성과로 대체하는 게 정상적 경로다. 그런데 딱히 잡히는 게 없다고 한다. 일자리가 늘지 않는다고 아우성친다. 주거 안정을 외친 정부에서 집값이 폭등해 많은 이들을 절망에 빠뜨렸다. 개혁을 위해 조국 민정수석을 유임했다는데, 검찰·경찰 개혁은 여전히 지지부진한다. 국가정보원법 개혁도 오리무중이다. 되레 청와대 참모들은 잇따라 사고 친다.
해가 저문다. 집권 3년 차다. 문 대통령 지지율은 취임 이후 최저치를 계속 경신한다. 경고등이 켜졌을 때 초심을 다잡는 게 민심을 얻는 지름길이다. 잘못된 통계·민생 정보를 입력하고, 체면 구긴 순방 일정을 짠 참모가 누군지,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따져야 한다. 대통령 지지율에 기대며 역할을 못 한 참모를 가려내고, 새해엔 쇄신을 해야 한다. 쓴소리하는 인재를 찾아 꼭 곁에 두길 바란다.
취임 때 한 수시 소통 약속도 다시 새겨야 한다. 하고 싶은 말보다, 국민이 알고 싶은 현안에 답해야 한다. ‘국민과의 대화’든, 신년회견이든 질문할 기회를 줘야 한다. 언제까지 외신 인터뷰만 베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대통령이 국내 언론과도 인터뷰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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