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나는 너다.” 일상적 존재로서의 ‘나’와 ‘너’의 연대를 꿈꿨던 황지우의 1987년 시집 제목이다. 지난 11일 숨진 태안화력 청년 노동자 김용균씨의 추모 문화제에 등장한 선언이고, 서울의 엘리트 대학에서 학생들과 만나면서 내가 고민했던 주제이기도 하다. ‘빈곤의 인류학’ 수업에서 학생들은 대개 두 종류의 빈곤에 관심을 내비쳤다. 하나는 글로벌 빈곤이다. 인터넷과 영어몰입교육, 해외여행으로 일찌감치 세계 시민으로서의 감각을 익힌 청년들은 국제개발 자원활동가로 참여하면서 글로벌 빈곤 퇴치를 자신의 책무로 자임했다. 한비야처럼 자유롭게, 반기문처럼 세련되게 글로벌 무대에서 활약하길 꿈꿨다. 이들이 언급한 또 다른 빈곤은 자기 자신을 향한다. 부모 세대가 습관처럼 강조해온 안정된 정규직과 성공 신화를 버릴 수도, 현실화할 수도 없는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제 처지의 비참함을 호소한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소위 ‘스카이’(SKY)에 진입했지만, 학교든 가족이든 경쟁은 이제부터라고 다그친다. 온갖 공모전을 기웃거리며 과잉 접속 상태에서 살다가도, 어느 순간 관계를 절연하고 ‘잠수’를 타기 일쑤다. 아침에 눈뜨고 싶지 않다는 얘기를 상담 중에 빈번히 듣다 보니 서울대 학생 절반이 우울증을 겪는다는 기사가 낯설지 않다. 하지만 자기 삶의 비극성에 대한 천착이 너무 큰 나머지 타인의 비참을 들여다볼 여유가 사라진 것은 아닐까? 빈곤 수업의 수강생들조차 기초생활수급자나 홈리스의 삶에 대해, 지역주민운동의 역사에 대해, 이 나라 도처에서 진행 중인 철거용역 폭력에 대해, 내년 1월이면 10주년이 되는 ‘용산 참사’에 대해 너무나 몰랐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이 외부로 확장되기보다 제 고통을 강조하는 수사로 남는 경우도 많았다. ‘나’는 지긋지긋한 헬조선을 탈출할 날만 기다리는 심정적 ‘난민’이자, 귀속될 만한 공동체 없이 온·오프라인을 배회하는 ‘이주자’이자, 도처에 깔린 몰래카메라의 시선에 몸서리치는 ‘여성’이자, 교수의 갑질에 시달리는 조교 ‘노동자’이자, 정상성을 강요하는 한국 사회에서 절룩이는 삶을 살아가는 ‘장애인’이다. 자신이 처한 실존의 빈곤에 대한 통렬한 인식과 예리한 비판은 분명 한국 사회 청년 당사자 운동을 가능케 한 힘들이다. 청년 관련 조례나 정책이 급증한 것은 국가의 미래를 짊어질 청년 세대가 무너지고 있다는 정부의 위기 인식도 한몫했지만, 청년 당사자들의 적극적인 문제 제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그런데도 물음은 남는다. 청년 당사자 운동이 연대하고자 하는 ‘청년’은 누구인가? 24살 발전소 노동자 고 김용균씨와 24살 서울의 4년제 대학생은 같은 ‘청년’으로 마주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을 비켜갈 수 있는 간편한 방법은 김용균씨를 ‘청년’ 대신 ‘비정규직 노동자’로만 호명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내가 연구해온 중국에서도 농촌에서 온 젊은 공장 노동자들은 ‘청년’ 바깥의 청년으로 남았다. 그러나 <중국 신노동자의 형성>에서 저자 뤼투(려도)가 강조했듯, 온라인 세상에서 세계 시민으로 살아가는 젊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도시 출신의 대학생과 “같은 세계의 같은 꿈”을 꾸고 있다. 청년 기본소득 운동이 제기해온바, 원치 않는 노동을 거부하고 자율적 삶을 추구할 권리를 김용균씨라고 마다했을까? “나는 너다”라고 선언하기엔 한국 사회가 너무 멀리 왔다는 불안감마저 든다. 그래도 ‘빈곤사회연대’에서 일하는 활동가를 인터뷰한 뒤 학생들이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은 곱씹고 싶다. “우리가 들으려는 노력은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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