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작년은 바로 1848년 혁명 170주년이 되는 해였다. 한데 보통의 한국인들이 의식하든 안 하든, 1848년에 유럽 각국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혁명들은 사실 한국사와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 무엇보다 20세기 한국사의 핵심어가 된 ‘민족주의’는, 정치세력으로서 다민족 제국들의 절대왕권에 대항한 1848년 혁명들 속에서 태어난 것이었다. 차후 조선을 침략하는 일제의 근대화 모델은 바로 프로이센 왕국을 중심으로 해서 ‘독일 민족 통일’을 이룩한 독일제국이었는데, ‘독일 민족 통일’의 표어는 실은 1848년 혁명 속에서 처음으로 제시됐다.
그런데 1848년에 태어난 것은 민족주의만이 아니었다. 근대적 혁명의 또 하나의 주체가 될 무산계급 역시 1848년에 역사의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영국에서 노동자들을 위시한 ‘모든 인민’들의 투표권을 요구한 ‘인민헌장’은 200만명 이상의 서명을 받았는가 하면, 1848년 6월 파리에서는 국가적 취로사업의 폐지에 분노한 노동자들이 무장 반란을 일으켰다. 영국과 프랑스, 산업혁명이 진행된 두 나라의 무산계급은 투표권과 취로사업 같은 형태의 생계 보장, 노동자들이 정치세력화되어 제대로 발언권을 가질 수 있는 민주주의 제도의 확립을 요구했다.
그 후로 170년이 지났다. 1848년에 급진적으로 들렸던 ‘1인1표제 민주주의’ 요구가 현대적 정치의 상식이 된 지 이미 70여년이 되었다. 노동자들이 정치세력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는 각종 사민당 지도자들이 정치 엘리트 집단에 편입된 것이 당연시된 지도 오래다. 그런데 왜일까. 170년 전의 노동자 반란을 방불케 하는 일이 또다시 같은 파리의 거리에서 일어났다. 직접적 원인이야 유류세 문제였지만, 유류세 도입 계획이 취소된 뒤에도 노란 조끼를 입은 대중들의 항의는 지속되고 있다. 한겨울 추위에도 시위 대열은 계속 거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의 보수언론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일부 ‘폭력 분자’들의 문제인가? 그렇다면 왜 70% 이상의 프랑스인들은 그들의 요구를 지지한다고 응답하고 있는가? 다수의 국민이 다 ‘폭력’의 편이 된 것일까?
물론 아니다. 노란 조끼들의 이유 있는 반란은 새로운 계층이 정치 무대에 도래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1848년 6월 파리의 시가전에서 정치세력으로서의 무산계급이 탄생했다면, 노란 조끼들의 반란은 정치세력으로서의 프레카리아트를 낳았다. 그리고 노란 조끼들에 대한 다수 노동계급 구성원들의 지지는, 이 새로운 계층이 모든 피착취 계층의 전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앞으로 다시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면 바로 프레카리아트의 혁명일 것이다.
프레카리아트는 말 그대로 ‘불안 노동자들의 계층’을 의미한다. 비정규직, 저임금, 무주택 노동 인구가 바로 여기에 속하는 것이다. 물론 고용관계가 불안하거나 월급이 낮거나 자기 집이 없는 노동자들이야 늘 있어왔다. 한데 세계 자본주의 황금기, 즉 1945년부터 1970년대 중후반 이전까지는 구미권에서는 주변부적 불안 노동은 어디까지나 ‘소수’였다. 젊은이들은 몇년간 계약직으로 일하며 셋집에 살아도 언젠가는 당연히 정규직이 되어 은행 융자를 받아 자기 집을 사거나 영구임대주택 같은 안정성 있는 주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인생설계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부모보다 조금 더 잘살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자녀들도 자신보다 더 나은 삶을 살 것이라는 전망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70년대 중후반 이후의 신자유주의 도입은 이와 같은 등식을 뒤엎어 노동계급을 분리시켜 놓았다. 전체 노동자의 50~60% 정도인, 주로 남성, 중년, 고숙련 노동자들은 정규직과 생활의 안정성을 나름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한데 노동계급의 핵심부라고 할 수 있는 정규직마저도 실제 임금의 인상은 더디거나 거의 없고 해고의 불안이 갈수록 높아져가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미국의 제조업 같으면 내가 태어난 1973년에는 평균 명목 시급이 4달러였는데 지금은 22달러다. 한데 그 46년간의 인플레이션까지 계산한다면 구매력 차원에서는 제조업 노동자의 임금은 그냥 제자리걸음이다. 거기에다가 오늘날 미국 일자리의 4분의 1은 저임금 일자리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른 구미권 나라에서도 제조업은 쇠퇴하며, 그나마 새 일자리를 제공해주는 서비스업에서는 젊은이들은 저임금 노동자나 비정규직이 된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구매력이 늘지 않는, 그리고 자녀가 자신보다 잘살기는커녕 저임금 직장밖에 얻지 못하는 노동자 부모들은, 노란 조끼들의 반란 같은 대중행동을 지지하지 못할 이유가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그렇다면 프레카리아트의 규모는 과연 어느 정도일까? 유럽에서 신자유주의가 덜 치열한 노르웨이만 해도 약 9%의 피고용자는 비정규직이며, 최하위 10%의 저임금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액은 전체 임금액의 5%에 불과하다. 대체로 전체 노동자의 1할이 빈곤층이 되었고 그들의 다수는 여성이나 청년들이다. 신자유주의가 가장 오랫동안 추진되고 있는 영국의 경우에는 대부분 신흥 빈곤층인 자영업자가 16%에 이르며 저임금 피고용자는 20% 정도다. 전체 인구의 38%는 자신이 거주하는 집을 소유하지 않고 집세를 내고 있다. 즉 전체 근로인구의 30~35%가 프레카리아트이거나 프레카리아트에 가깝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런데 청년층의 경우 프레카리아트나 준프레카리아트가 이미 절반을 넘는다. 이들은 부모만큼 상대적으로 편하게 살 수 없다는 것은 물론, 평생 동안 저임금 이상의 정규직과 내 집을 가져볼 확률이 거의 없다는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들이 오늘날 파리의 거리에서 보이는 행동을 ‘폭력’이라고 비난하는 한국 보수언론들은 과연 절망의 절규라는 게 무엇인지 알기나 하는가?
노란 조끼를 입은 프랑스의 프레카리아트는 지금 최저임금과 연금 인상과 함께 외주화 금지, 비정규직 양산의 중지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요구한다. 프랑스 노동자들은 대부분 이 요구들을 지지한다. 그런 의미에서 프레카리아트는 노동계급의 전위다. 그러나 그럼에도 지금 프랑스의 좌파정당이나 노조들이 이 프레카리아트 운동을 이끌어나가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고숙련 조직노동자에 의존해 의회정치에 안주해온 타성 탓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프레카리아트는 노조 가입을 하고 싶어도 할 여건이 안 될 뿐만 아니라, 의회정치 자체를 불신한다. 프레카리아트는 직접 행동의 언어로 발화한다. 기존의 좌파들은 다시 한번 거리 행동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유럽 프레카리아트의 혁명적 움직임들은 한국인들에게 남의 일일까? 결코 아니다. 한국의 경우 비정규직 비율(약 32%)과 저임금 노동자(전체 고용인구의 23.7%), 영세 자영업자(전체 근로인구의 약 18%)의 비중, 무주택 가구(전체 가구의 44% 정도)의 수 등을 염두에 두면 ‘광의의 프레카리아트’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전체의 35~40%로, 구미권 평균을 오히려 웃돌 것이다. 프랑스 등과의 가장 큰 차이는 절망의 수위다. 프랑스의 프레카리아트는 족쇄밖에 잃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이미 간파했지만, 한국의 알바생이나 파견직 노동자, 월세방 거주자들에게는 아직 가족의 도움이나 경제성장에 대한 기대가 남아 있다. 한데 이 기대들이 없어지는 것도 시간문제다.
그래서 한국 진보가 프랑스 진보의 오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이제라도 프레카리아트의 투사, 하도급 노동자와 청년 실업자, 편의점 알바들의 대변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밑으로부터의 혁명적 에너지가 진보적 변혁의 원동력으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의 희망을 박탈당한 사람들이 어차피 급진화할 수밖에 없는 시대에 좌파가 그들을 이끌지 못한다면, 그 자리를 잘못하면 극우파가 대신 비집고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