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정권 시절 장외투쟁은 야당이 국민과 함께 부당한 권력에 맞서는 가장 강한 무기였다. 신한민주당의 ‘직선제 개헌 추진 1천만인 서명운동’이 본보기다. 1986년 3월11일 거리로 나선 신민당은 직선제 개헌을 거부한 전두환 정권에 시·도별 개헌추진위원회 결성으로 맞섰고, 국민과 함께 6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다. 자유당, 공화당, 민주정의당, 민자당으로 이어온 보수 여당은 야당의 장외투쟁에 항상 빨갱이, 친북용공, 주사파 등 색깔론을 덧칠했다.
그런데 1997년 대선 패배로 졸지에 야당이 된 한나라당은 수시로 거리로 뛰쳐나갔다. ‘보수 야당’의 첫 장외투쟁은 1998년, 이석희 국세청 차장이 이회창 후보의 측근들과 대선 자금을 모금한 ‘세풍 사건’을 검찰이 수사하자 시작됐다. 이들은 야당 탄압이라며 31일 동안 거리에 머물렀다. 1999년엔 장외투쟁을 일상화했다. 1999년 1월 ‘안기부의 정치사찰’, 5월 ‘정부조직법 강행처리’, 11월 ‘언론대책 문건’에 반발해 부산·대구 등에서 대규모 장외집회를 이어갔다. 그러나 잦은 장외집회, 지역감정 조장 등 퇴행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며 역풍이 불었다. 당 안에서도 고립을 우려하며 등원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2000년 7~9월 여당의 ‘국회법 날치기’에 반발해 다시 거리로 나섰지만, 당시 부총재 박근혜와 손학규·김덕룡·박관용 등 비주류 중진들은 ‘장외투쟁 중단’을 요구하면서 내분에 휩싸였다. 그러나 박근혜도 당 대표가 된 뒤 장외투쟁을 적극 활용했다. 2005년 12월 열린우리당이 사학법 개정안을 처리하자 그는 국회를 공전시킨 채 53일을 장외에서 버텼다. 당시 최고위원 원희룡은 “박 대표의 사학법 개정 이념투쟁은 병”이라고 반발했다. 당 안팎의 비난 여론이 드세지자 결국 여당과 사학법 재개정 추진에 합의하면서 국회로 회군했다.
장외투쟁은 양날의 칼이다. 정권에 맞설 무기지만, 여론의 지지를 잃는 순간 내분의 불쏘시개가 된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쳐 다시 야당이 된 자유한국당, 공안검사 출신 황교안 대표 주도로 이미선 헌법재판관 임명에 반발해 10여년 만에 장외투쟁을 시작한 그들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신승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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