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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연와시위’에도 염치가 있다 / 김영희

등록 2019-04-29 16:03수정 2019-04-29 19:01

서로 팔짱을 낀 채 드러눕는 이른바 ‘연와시위’는 비폭력 시위의 상징이다. 1980년대 연와시위가 잡힌 날이면, 참가자들은 연행을 각오하며 나섰다. 실제로는 최루탄이 터지면 일어나 도망치는 경우도 적잖았지만, 진압경찰이 손발을 붙들고 한명씩 떼어낼 때까지 쉽게 대오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연와시위가 한국 시위 현장에서 대중적 주목을 받은 건 1987년이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폭로된 직후인 그해 5월23일, 비가 내리는 서울 종로 일대 거리에 대학생들이 드러누웠다.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와 산하 조직인 ‘호헌철폐와 민주쟁취를 위한 서울지역학생협의회’가 계획한 대규모 비폭력 평화시위였다.

처음 시도된 이 시위 방법에 학생들은 ‘모두가 잇대어 드러눕는다’는 뜻으로 ‘연와’(連臥) 시위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그 전까지 거리시위는 도로를 점거하고 짧은 순간 구호를 외치며 유인물을 나눠주다 진압경찰이 몰려오면 보도블록이나 화염병을 던지는 방식이 대부분이었다. 이 때문에 학생들의 주장에는 공감을 해도 방법에는 동의하기 어렵다는 시민들이 적지 않았다.
(<한겨레>, ‘20년 전 시위’ 키워드로 본 6월항쟁) 이날 사과탄이 터지는 가운데 경찰의 발길질과 주먹질에도 맨몸으로 “독재타도”를 외치며 버티는 학생들의 모습에 시민들은 박수를 보내고 경찰에 야유를 보내거나 항의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오픈아카이브가 이 장면을 “6·10 민주항쟁의 예고편”이라고 소개해놓은 이유일 게다.

그다음 해인 88년엔 대학가에 통일운동이 번지며 판문점으로 향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뜨거웠다. 서울 홍제동에선 몇만명의 학생들이 거리에 누워 남북 청년학생 회담을 요구했다. 1991년 전경들의 집단구타로 숨진 강경대 치사사건 규탄대회의 참가자들은 천으로 서로 몸을 묶고 도로에 누워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후 학생 시위는 물론 노동자들이나 장애인 시위 등에도 연와시위는 등장하게 됐다. 분명한 것은 늘 연와시위는 권력의 탄압에 맞선 소수자와 약자의 수단이었다는 점이다.

지난주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국회 상임위 회의장 앞에 누워 “독재타도, 헌법수호”를 외쳤다. 수십년 전 어디에 있었는지 따지겠다는 건 아니다. 특정 시위방식이 어느 세력의 전유물이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선거법 개정에 어깃장을 놓은 거대 야당의 시위 방식치고는 너무나 생소했다. 연와시위에도 염치가 있다.

김영희 논설위원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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