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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슈논쟁] 안전한 임신중절 위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 고경심

등록 2019-04-29 17:41수정 2020-11-16 15:41

낙태죄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은 보건의료 관점에서 볼 때, 2016년 유엔 국제규약 ‘여성의 성과 재생산 건강권’ 보장을 위한 중요한 변화의 시작이다. 낙태죄 폐지 이후, 향후 법 개정 작업에서 임신중절(‘낙태’ 대신 ‘임신중절’이라는 용어를 쓰고자 한다)이 여성의 생명과 건강에 필수적인 의료서비스로 자리매김을 해야 할 것이다. 법 개정에 예상되는 쟁점이라 여겨지는 임신 주수 제한과 허용 사유, 의사의 진료거부권 논란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수술이 가능한 임신 주수 제한에 대한 논란이 예상된다. 이는 여성 건강의 안전과 위해성, 태아의 생존 가능성, 여성의 자기결정권의 범위 등이 충돌하면서 사회적 합의와 조정이 필요한 논점이다. 임신중절이 합법화된 서유럽 국가들에서도 각기 다른 임신 주수 제한 규정과 요건이 존재한다. 여기에는 각 나라의 보건의료 수준과 의료전달체계, 국민의 의료정보 이해능력, 여성들의 자기결정권 보장과 사회적 요구 등 다양한 요소가 개입하게 된다.

세계보건기구(WHO)도 임신 초기에 ‘안전한 임신중절’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임신중절 합법화가 필요하다고 요청하고 있다. 여성의 건강상의 위험과 합병증에 대한 우려로 ‘안전한 임신중절’이 가능하려면 가능한 임신 초기에 해야 하므로, 임신 주수 제한이라는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한 논문에 의하면 임신 8주 이내의 임신중절은 자연유산이나 출산의 위험보다는 낮으며, 임신 8주가 지나면 주수가 증가함에 따라 위험도가 2배씩 증가한다고 보고하였다. 국제산부인과학회 윤리지침에서도 임신 제1삼분기(임신 첫 14주까지)에 적절하게 수행되는 임신중절은 만삭 분만보다 더 안전하다고 권고하고 있어, 이를 기준으로 하는 ‘여성의 요청에 따른’ 또는 ‘사회·경제적 이유에 따른’ 수술이 가능한 시기를 임신 14주 이내에 두는 국가가 다수다.

현행 모자보건법에서는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태아가 모체 밖에서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시기에 태아와 그 부속물을 인공적으로 모체 밖으로 배출시키는 수술’로 정의한다. ‘모체 밖에서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시기’의 결정은 현재의 의료 수준, 특히 미숙아 관리를 전문으로 하는 신생아학 분야의 평균적 의료 수준이 중요한 결정의 준거가 된다. 현행 모자보건법 시행령에서는 임신 24주로 정하고 있으며, 세계보건기구는 임신 22주로, 국제산부인과학 교과서에서는 임신 20주로 정하고 있다. 이번 헌재 결정문 중 헌법재판관의 의견에 임신 22주가 언급된 것은 세계보건기구의 기준을 따른 것이다.

임신 14주 이상 중기 임신중절의 경우에는 위험성과 합병증 발생이 높아지고 수술 방법도 복잡해져서 잘 훈련된 의료인이라도 위험부담과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다만 임신한 여성의 생명과 신체 및 정신 건강에 현저한 위험을 초래하는 의료적 사유가 있을 경우는 임신 주수에 상관없이 임신중절이 허용되어야 한다. 성폭력이나 근친상간, 태아 기형, 임신을 인지하지 못하여 진단이 늦어진 청소년이나 인지기능 장애 여성의 경우 등 특수한 경우에는 중기 임신중절도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고 본다. 실제 태아의 신체적 기형은 임신 20주가 지나야 초음파로 발견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둘째, 의료서비스 제공자인 의료인에 대한 교육 및 훈련이 중요한 과제로 꼽힌다. 그동안 불법이라는 이유로 제외되었던 의과대학 교육과 산부인과 전공의 훈련 매뉴얼이 필요하고 숙련된 의료 인력이 양질로 제공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필수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때 의사는 환자에게 설명 의무를 가진다. 임신중절도 마찬가지로 수술 방법, 예상되는 부작용이나 합병증, 수술 후 피임 방법, 문제가 생겼을 때 대처 방법 등 포괄적인 설명을 하여 정보 제공 동의를 받아야 한다. 필요할 경우, 환자가 원하면 수술 뒤 상담과 정신과 치료도 가능해야 할 것이다.

셋째, 임신중절에 대한 접근성에서 차별적 요소가 없도록 개선이 필요하다. 현행 모자보건법상 배우자 동의 요건이 여성의 입장에서는 배우자의 결정에 종속돼 자율적 결정을 차단하는 성차별적 요소였다. 이와 함께 청소년과 장애인, 성소수자, 에이치아이브이(HIV) 감염인, 성폭력 피해자, 저소득층 여성과 부부 등 사회적 약자에게 차별적인 접근성 장애 요소를 제거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들에게 가용성 있고 부담 가능한 지불 수준을 마련하기 위해 공공 재원에서 지원하는 제도적 장치들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임신중절을 원치 않는 의사들이 진료거부권을 요청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이는 기존 지침이나 관련 법에 근거해 다양하게 해결 방안을 모색해볼 수 있다. 국제산부인과학회의 윤리지침에서는 종교적 신앙 또는 윤리적 신념에 따라 수술을 원치 않는 의사는 수술이 가능한 동료 의사나 병원에 의뢰할 것을 의무로 하고 있다. 또 현행 의료법 제15조(진료 거부 금지 등)는 ‘의료인 또는 의료기관 개설자는 진료나 조산 요청을 받으면 정당한 사유 없이 거부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유권해석을 통해 진료 거부의 ‘정당한 사유’에 관련 항목을 추가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다만 임신중절을 원치 않는 의사들도 여성에게 불필요한 수치심이나 죄책감을 주지 않으면서 수술에 대한 정보 제공과 설명 의무를 다해야 하며, 가능한 동료 의사나 병원으로 의뢰하는 것을 의무로 하는 항목의 신설도 가능하다고 본다.

고경심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이사·산부인과 전문의

[이슈논쟁] 낙태죄 폐지, 그 이후

헌법재판소는 지난 11일 임신중지(낙태)를 하는 여성과 의료진을 처벌하도록 한 낙태죄 처벌 조항이 헌법에 합치되지 않는다며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현행 처벌 조항이 극히 일부 경우를 제외하고 임신중지를 전면 금지함에 따라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과도하게 침해한다는 것이다. 이번 헌재의 결정에 따라 내년 말까지 관련법 개정도 이루어져야 한다. 낙태죄를 둘러싼 오랜 논란이 일단락되었지만, 정치권과 여성계, 의료계 등 안팎에선 향후 추진될 법 개정을 둘러싼 논쟁이 한층 더 뜨거울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정부·여당도 일단 법안 발의를 서두르는 것보다는 사회적 공론 형성에 주력한다는 방침이다. 산부인과 전문의 고경심·최안나의 기고를 통해 예상 쟁점을 미리 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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