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철
논설위원
“이 정부가 제대로 못하는 게 많지만 서민에게 더 분배하자는 방향은 맞는 거 아닌가요? 수십년간 기업, 부자들 소득은 많이 늘었는데 노동자, 서민 소득은 별로 안 늘었어요. 몇몇 정책이 문제라고 해서 아예 다른 식으로 하자는 건 아니죠. 그건 결국 이명박, 박근혜 때로 돌아가자는 거예요.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난 이 정부가 잘돼서 계속 민주정부에서 살고 싶어요.”
얼마 전 술자리에서 지인이 한 말이다. 평범하지만 솔직했다. 하지만 동석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게 말이 되냐” “사회주의 하자는 거냐” “이대로면 문재인은 총선에서 망하게 돼 있다”고들 흥분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이 정부는 술자리 안줏감이 된 지 오래인 듯싶었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지난 대선에서 문 대통령을 찍었거나, 적어도 홍준표 후보를 찍지는 않았을 것 같은 이들이었다. 그때 문득 ‘십수년 전 노무현이 이렇게 외톨이가 된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23일 오후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 추도식이 열리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문 대통령 형편도 별로 다르지 않다. 노무현을 극복하겠다고 했지만 지금은 장담할 수 없는 형국이 됐다.
자리를 파하고 오면서 ‘촛불정부는 누구의 것일까’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흔히 촛불혁명의 미래는 문 대통령 한 사람의 어깨에 달렸다고들 한다. 촛불정부가 마치 문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의 것인 양 생각한다. 정치권, 언론, 시민단체나 학계 모두 대통령이 전지전능한 ‘촛불의 마법사’가 돼주길 바란다. 하지만 이는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런 기대는 대개 실망과 낙담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촛불혁명의 담지자는 시작부터 그랬듯 오롯이 시민들일 것이다. 촛불을 켜 든 시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촛불혁명의 주체임에 틀림없다. 촛불정부는 우리들, 시민들의 것이다. 또 선거로 출범한 정부이기에 국민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
문재인 정부 2년을 맞아 진보개혁 성향 일부 학자들이 현 정부가 촛불정부의 소임을 제대로 못했다고 질타했다. 큰 틀에서 틀리다고 할 수 없다. 다만, 그 질타는 복잡한 현실의 여러 측면을 보지 못한 채 촛불정부에 과도하게 기대한 데에서 비롯된 건 아닐까?
우리 사회에는 분단에 뿌리를 둔 재벌과 극우의 기득권 구조가 여전히 강고하다. 이런 현실에선 민주정부의 길은 험난하고 더딜 수밖에 없다. 경제든 외교든 뭘 좀 해보려고 하면 꽉 막힌 현실의 장벽들이 여기저기서 발목을 잡는다. 실천적 지식인이라면 현실을 냉철히 살피고 한 걸음씩 전진할 수 있는 혈로를 뚫는 데 앞장서야 한다.
정치권이나 언론은 매번 대통령 탓을 하는데, 이젠 지겨울 정도다. 잘돼도, 못돼도 모두 대통령 탓이다. 몇몇 정책 혼선을 두고 나라가 결딴난 듯 매일 대서특필하는 건 좀 심하다. 격차를 줄이겠다고 공약해서 대통령이 됐는데 그 기조를 폐기하라는 건 대통령을 관두라는 얘기처럼 들린다. 정치권도 언론도 좀 달라질 때가 됐다.
시민들이야말로 묵묵히 일상에서 촛불의 과제를 일구는 이들이다. 공론장을 일으키고 끌어가는 데 책임있게 나서고, 주권을 표시할 수 있는 기회를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는다. 맹목적·무비판적 추종이 아니라 합리적·대안적 비판과 참여를 지향한다. 문 대통령 2주년 대담이 진행 면에서 다소 미숙하고 준비가 덜 돼 보였지만 그렇다고 진행자를 패륜아 취급할 일은 아니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문 대통령의 책임은 막중하다. 지난 2년 쉼 없이 달려왔지만 집권 초기의 ‘촛불정부’ 위용을 이어가진 못했다. 문 대통령 역시 남 탓 하기 전에 내 탓 하는 모습을 보였으면 한다. 중요한 정책적 혼선에 대해선 국민 앞에서 허심탄회하게 정리하고 넘어가는 건 어떤가.
촛불정부 2년을 맞아 문 대통령이 ‘독재의 후예’를 언급한 건 양보할 수 없는 대원칙은 지켜나가겠다는 다짐으로 보였다. 노무현은 말년에 몇몇 정책에서 진보의 끈을 쉽게 놓은 걸 후회했다. 문 대통령이 통합을 항상 염두에 두면서도 진보의 끈을 놓지 않길 바란다.
어쩌면 이 많은 얘기들은 나를 향한 반성과 다짐인지도 모른다. 노무현, 그가 떠난 지 10년이다.
kcbae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