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시가 뭐냐, 네시라고 써야 한다.” 선생님은 학생을 보면서 꾸짖었다. 말소리에 맞춘 표기가 자연스럽다는 뜻이자, 표기란 그저 말소리를 받아 적는 구실을 할 뿐이라는 생각이다. 신문에는 ‘7쌍의 부부 중 5쌍은 출산했고, 1쌍은 오는 10월 출산을 앞두고 있다’고 쓰여 있다. 이런 기사는 읽기에 껄끄럽다. ‘칠쌍’으로 읽다가 다시 ‘일곱쌍’으로 바꾸어야 한다. 머릿속 전광판에 ‘7(칠)’과 ‘일곱’이 동시에 껌뻑거린다. 문자와 발음이 어긋나 생기는 일이다.
‘하나도 없다, 하나도 모른다’를 ‘1도 없다, 1도 모른다’로 바꿔 말하는 게 유행이다. 표기가 말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한국어에 서툰 어떤 가수가 ‘뭐라고 했는지 1도 모르겠’다고 쓴 게 발단이었다. ‘1도 없다’는 한자어와 고유어라는 이중체계를 이용한다. 고유어 ‘하나’를 숫자 ‘1’로 적음으로써 새로운 말맛을 만든다. 아라비아숫자를 쓰면 고유어보다 ‘수학적’ 엄밀성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예순두살’이라고 하면 삶의 냄새가 묻어 있는 느낌인데, ‘62세’라고 하면 그냥 특정 지점을 콕 찍어 말하는 느낌이다. 소주 ‘한병씩’보다 ‘각 1병’이라고 하면 그날 술을 대하는 사람의 다부진 각오가 엿보인다. 이 칼럼에 대해 ‘재미가 하나도 없다’고 하는 사람보다 ‘재미가 1도 없다’고 하는 사람에게 이가 더 갈릴 것 같다.
여하튼 변화는 가끔은 무지에서, 가끔은 재미로 촉발된다. 새로운 표현을 향한 인간의 놀이를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미꾸라지가 헤엄치는 웅덩이는 썩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