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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채윤의 비온 뒤 무지개] 술은 죄가 없고 당신은 죄가 있다

등록 2019-07-11 18:05수정 2019-07-15 12:54

한채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조선왕조사에서 가장 술을 좋아한 왕인 세조는 홍윤성이란 신하를 매우 아꼈다. 홍윤성이 어느 여성을 강간하려고 한 일로 탄핵을 해야 한다고 상소가 빗발치자 세조는 홍윤성을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홍윤성은 술에 취해서 그 집에 잘못 들어갔을 뿐이라고 답했고 세조는 술에 취한 사람에게 무슨 죄를 묻냐며 끝끝내 홍윤성을 벌하지 않았다.

며칠 전 어느 지상파 방송사의 앵커가 지하철에서 타인의 옷 속을 불법촬영을 하다가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그는 음주를 한 상태라고 밝혔다. 술을 마시는 것과 타인의 옷 속을 촬영하는 것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지난해 말, 대학 내 여자 기숙사에 침입해 성폭행을 시도했던 20대 남성도 집행유예를 받았다. 만취로 인한 심신미약이 인정된 것이다. 이쯤 되면 술에 취하면 성범죄를 저지르고 싶어지는지 궁금하다. 법원은 술의 죄를 물어 주류 판매를 전면 금지해야 할지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술에 취한 상태로 왜 집이 아니라 여자기숙사를 가게 되었는지를 따져야 한다.

근래 술이 감형의 이유가 될 수 없다는 목소리도 높아서일까. 흥미로운 현상도 보인다. 정작 가해자는 가만히 있는데 여러 범죄 심리 전문가들이 나서서 열심히 가해자의 심리를 해명해준다. 언론인, 부유층, 의사, 판사 등의 사회적 지도층이 불법촬영과 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이유가 높은 도덕성과 윤리를 기대하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억압된 욕구’를 ‘성적 일탈’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그럼 대학생이나 평범한 직장인들이 불법촬영 범죄를 저지르는 이유는 도덕성에 대한 요구가 낮기 때문인가. 재벌, 정치인, 연예인, 언론인, 성직자, 의사, 판검사 들의 범죄가 연일 신문의 사회면을 뒤덮고 있는데 어느 국민이 이들이 부담을 느낄 정도로 높은 도덕성을 기대하고 있는가. 일말의 염치라도 있으면 다행이다 싶은데.

가해자가 왜 그런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다. 가해자의 이유를 아는 것이 우리에게 교훈으로 남지는 않는다. 이주민 아내를 폭행한 남성은 구속되면서도 이렇게 말했다. “언어가 다르니까 생각하는 것도 다르고, 그것 때문에 감정이 쌓인 게 있다. 다른 남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버닝썬 클럽의 이문호 대표도 인터뷰에서 같은 말을 했다. “승리의 카톡 내용이 죄가 된다면 대한민국 남자들 다 죄인이지 않냐.” 오히려 이제는 궁금해진다. 대체 남자들끼리는 어떤 문화와 의식을 공유하고 있길래 이런 말들이 쉽게 나오는 것인가.

우리나라 형법에는 심신장애로 인한 행위는 형을 감경하는 규정이 있다. 심신미약으로 형을 감경하는 것은 필요하다. 문제는 이것이 너무 많은 남성들의 성범죄의 무게를 덜어주는 용도로 악용되고 있지 않냐는 것이다. 2008년에 8살 여아를 성폭행한 조두순마저 심신미약으로 형이 감경되자 주취감경을 폐지하라는 목소리가 높았다. 국회에서 법 개정을 논의했지만 지지부진하다가 결국 2018년 피시(PC)방 아르바이트생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생긴 뒤에야 국회를 통과했다. 형법 제10조 2항은 감경한다는 문구를 ‘감경할 수 있다’로 수정했다. 처음에 수정을 원했던 목소리는 음주한 상태에서의 성범죄는 감형할 것이 아니라 음주 운전에 대한 것처럼 가중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술을 마셨다고 해서 모르는 여성을 성폭행하는 것이 자연스러운가. 술을 마셨다고 해서 카메라를 꺼내 몰래 타인을 촬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가. 누구나 실연을 하면 마음이 아프고 죽을 만큼 힘들다. 하지만 실연 때문에 상대에게 주먹과 발길질을 하고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로 힘들 수도 있다고 이해해주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떠올려야 한다. 성범죄도 술 탓이라고 눈감아주던 세조는 나중에 홍윤성이 삼촌을 죽이고 암매장하는 것까지 모두 덮어준다. 홍윤성은 영의정까지 올랐다. 술이 사람 대신 죄를 덮어쓰지 않아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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