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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386 엄마’의 비극 / 김영희

등록 2019-08-29 17:46수정 2019-08-29 18:55

김영희
논설위원

우연이겠지만 참 묘한 타이밍이다. 조국 법무장관 후보자 딸 논란이 거센 요즘, 문화방송은 에듀버라이어티를 표방한 <공부가 머니?>를 시작했다. 사교육에 고민하는 가정 사례를 관찰카메라로 보여주면 전문가들이 진단과 처방을 해준다. 아이를 명문대 5곳 수시에 모두 합격시킨 ‘돼지맘’ 출신 컨설턴트에겐 특히 감탄과 부러움이 쏟아졌다. 첫 상담자로 대치동에 살면서 6살, 7살, 9살 세 자녀에게 모두 34개 사교육을 시키는 배우 임호씨 부부를 등장시켰다. 충격적인 사교육 실태지만, ‘자녀 스펙쌓기 품앗이’가 가능한 계층에 비한다면 이런 이들조차 힘겹게 버둥대며 사는 듯 보일지도 모르겠다.

이젠 예능까지 사교육 조장인가. 분개하다가 마음이 착잡해진 건 임호씨 아내 때문이었다. 그는 “대치동엔 더한 집도 많다”며 불안해한다. 일에 바쁜 아빠는 가끔 아이들과 놀아주고 숙제도 돌봐주는 따뜻한 모습인 반면, 엄마는 식사 때도 “숙제 했니”를 연신 확인해 분위기를 싸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엄마의 ‘외로움’을 걱정하지만 그 해법은 ‘좋은 교재를 알려줄 테니 아이를 직접 가르치는 시간을 늘리고 효율적인 사교육을 하라’는 것이다. 아이를 힘들게 하는 것도 잘하게 하는 것도 ‘기-승-전-엄마’다.

조 후보자 딸 논란에도 엄마는 등장한다. 단국대·공주대 인턴 참여에 엄마가 거론되지만, 구체적인 개입이 밝혀진 건 없다. 그런데도 후보자를 두둔하는 쪽조차 ‘엄마가 좀 심했을 수 있다, 한데 아빠가 세세히 알겠나’라는 식의 인식을 비치는 경우가 많다. 엄마의 정보력과 아빠의 무관심이 ‘대학진학 공식’처럼 받아들여지는 세상에서 이해 못할 반응은 아니다. 실제 자녀 일은 몽땅 아내에게 맡기거나 ‘발언권’이 없는 386세대 남성들을 살아오면서 너무 많이 봤다. 서울대에 자녀가 합격한 한 선배는 “일찍 들어오면 방해가 된다고 해서 난 밤늦게 아이스크림 사갖고 들어간 게 전부”라고 당당히 말했다.

하지만 엄마에 대한 평가가 절대적으로 자녀의 성적과 대학 진학에 따라 결정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386 세대유감>에서 저자들은 “2010년 안팎 사커맘, 헬리콥터맘, 타이거맘 등 각종 맘 신드롬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과 386세대 부모의 자식들이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때가 공교롭게도 일치한다”며 “부동산과 더불어 자식 교육까지 성공적으로 마친 386세대 주부들은 집안 내 권력관계를 재조정하며 남편들을 집안 내 2등 시민으로 전락시킨다”고 지적한다. 꼭 주부들만 해당하는지, 여성이 그래서 집안 내 진정한 1등 시민인지,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사교육 ‘불안’과 자녀 스펙쌓기 ‘경쟁’에 엄마들이 내몰리는 것, 그리고 그 구조가 나를 포함한 386세대들이 학부모가 되면서 공고해진 현실을 부인하긴 힘들다.

무한경쟁 사회 속에서 ‘불안’은 다른 계층으로, 다른 세대로 끊임없이 확대재생산됐다. 화이트칼라 직업맘은 시간을 쪼개가며 경제적 동맹체인 중산층 가족을 유지하는 ‘기획자’로 산다.(<기획된 가족>, 조주은) 한때는 전업주부에 비해 절대적 시간이 모자라 불리한 듯했지만, 발빠른 일부 ‘전문직’ 엄마들은 이내 지적 자본이나 네트워크 역시 유효한 무기임을 깨달아갔다. 개개인은 그저 ‘자녀에게 좀더 좋은 기회를 주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하더라도 헬조선을 만든 ‘미필적 고의’에 해당한다는 <386 세대유감>의 지적은 뼈아프다.

조 후보자 딸과 관련한 의혹 제기에는 부풀려진 면이 많다. 하지만 그토록 비판해왔던 ‘엘리트층의 가족주의’를 그 역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은 분명하다. 각자도생의 사회구조와 제도, 고쳐야 한다. 그런데 교육과 자산에서 그 어떤 세대보다 시대의 혜택을 받으면서 도덕적 우위까지 누려온 386세대의 이중성이 드러난 지금, ‘공정’과 ‘정의’란 말이 누구를 향해 어떤 설득력을 가질지 그 냉소가 난 두렵다. 한 여성학자는 “386 여성들은 대학에서 남성들과 함께 운동도 하고 정의를 얘기했지만, 사실 가정에서도 사회적으로도 사회진출을 격려받으며 자란 세대가 아니다. 이들이 집에서 아이 성적으로 자기성취를 하기 시작한 게 386세대의 비극 같다는 생각이 요즘 든다”고 말했다. 그 안에서 여성들은 희생자일까, 공동정범일까.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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