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낮엔 천사, 밤엔 악마. 이중성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이다. 삶을 수련에 비유한다면 삶의 수련은 선의 편에 서서 악을 증오하는 일이 아니다. 선악이 엉망진창 뒤범벅된 수렁 한가운데에서 뭔가를 추구하는 일이리라. 이게 진실에 가깝다는 걸 언어가 보여준다. 하나의 말 속에 정반대의 뜻이 함께 쓰이는 경우가 있다. 사고로 가족을 잃은 사람에게 ‘이런 기막힌 일을 당하다니…’라 할 때 쓰인 ‘기막히다’는 그 일이 너무 놀라워 할 말을 잃을 정도라는 뜻이다. 반면에 ‘음식 맛이 기가 막히네’라 할 땐 뭐라 할 수 없을 만큼 좋다는 뜻이다. 이런 예가 적지 않다. ‘괄호 안에 적당한 답을 고르시오’에 쓰인 ‘적당하다’는 거기에 꼭 알맞다는 뜻이지만,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적당히 해’라 하면 대충 하라는 뜻이다. ‘적당주의’가 여기서 나왔다. 목숨을 뺏는다는 뜻의 ‘죽이다’는 멋지거나 좋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춥거나 무섭거나 징그러울 때 돋던 ‘소름’이 요새는 굉장히 감동적인 장면에서도 돋는다. 놀랍게도 모든 말은 ‘반어적’으로 쓰일 수 있다. 당신도 ‘멋지다, 훌륭하다, 잘났다, 잘했다, 착하다, 꼼꼼하다, 배포가 크다’ 같은 ‘좋은’ 말로 앞사람을 순식간에 ‘열 받게’ 할 수 있다. 겉으로 들리는 말 뒤에 숨겨둔 의미를 눈치 있게 해석해내기 때문이다. 말을 듣는 순간, 아니 듣기 전부터 맥락을 파악하고 가능한 의미들 중 하나를 정확히 집어낸다. 소통이란 겉과 속, 표면과 뒷면이 배반적인 말 사이를 작두 타듯 위태로우면서도 날렵하게 헤엄치는 것이다. 이중성과 함께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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