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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2030 리스펙트] 현재가 지배하는 사회 / 이은지

등록 2019-09-29 17:32수정 2019-09-29 19:51

이은지
문학평론가

최근 유튜브 <에스비에스>(SBS) 채널에서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인기가요 영상을 실시간으로 스트리밍하여 화제가 되고 있다. 그 당시 학창시절을 보냈던, 이제는 중년이 된 이들이 추억의 무대를 보러 몰려든 것을 두고 어르신들의 낙원인 탑골공원과 같다 하여 ‘온라인 탑골공원’이라는 재미있는 명칭도 따라붙었다.

한동안 온라인 탑골공원에서 소일하면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인터넷 언론에서 여러번 다루기도 했듯이 실시간 채팅창에서는 당시 출연했던 가수들에게 별칭을 다는 것이 일종의 놀이이다. 예컨대 스페이스 에이의 멤버 루루는 ‘탑골 제니’, 걸그룹 파파야는 ‘오래된 캬라멜’, 쿨의 보컬 이재훈은 ‘다이소(보급형) 조정석’으로 부르는 식이다.

탑골 드립으로 불리는 이런 놀이가 특별히 흥미로운 까닭은 과거의 인물들을 철저히 현재 시점에서 재조명함으로써 ‘현재화’하기 때문이다. 발신되는 영상도 이를 찾는 사람의 심리도 과거에 연원을 두지만 이를 소비하는 행위만은 철저히 현재가 기준이 된다. 몇분짜리 무대의 인물을 정의하는 별칭들이 채팅창에 던져졌다가 금세 스크롤이 올라가는 찰나의 순간에, 화면 속 인물과 별칭이 얼마나 들어맞는지 따지는 데 유희가 집중되어 있다.

무너진 일본 교육 현장에 대한 우치다 다쓰루의 분석은 이 현상을 검토하는 데도 유효하다. 우치다 다쓰루는 학생들이 시민의 권리인 교육을 자발적으로 거부하는 까닭은 교육을 받기 전부터 스스로를 소비주체로 정립시켰기 때문이라고 본다. 글자도 못 깨친 어린아이라도 돈만 쥐고 있으면 여느 어른과 동일한 소비자로 대접받는다. 화폐와 상품을 등가교환하며 일찌감치 체화된 소비주체의 정체성은 학교에서 제공되는 교육과 공부하기 싫은 감정을 일대일로 놓고 저울질하게 한다. 공부의 목적과 결과를 고려하기보다 그저 지금의 감정으로 재단한다.

탑골 드립은 과거와 현재의 이미지를 실시간 채팅이라는 찰나의 순간에 등가교환하여 그것이 가장 적절하게 맞아떨어졌을 때 찾아오는 즐거움을 원리로 작동한다. 사람들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상태에서 현재를 구성하는 것들과 유사한 이미지를 포착하는 훈련을 자연스레 하게 된다. 그렇게 과거는 현재를 변주한 일개 코드가 되어 현재를 강화한다. 사실 과거에 대한 이런 식의 체험은 오늘날 아주 흔한 것이다. 영화가 흥행한 뒤에 본편의 서사에 선행하는 시간대의 이야기를 사후적으로 제작하는 ‘프리퀄’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미국의 미디어 이론가 더글러스 러시코프는 소비자주의와 디지털 매체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우리 시대를 ‘현재주의’(presentism)의 시대로 규정한다. 생산과 운송에 얼마가 걸렸든 상관없이 무엇이든 지불만 하면 움켜쥘 수 있는 소비자로서 우리는 시계가 없는 백화점처럼 오직 현재에만 멈춰 있는 시간대를 살고 있다. 디지털 매체가 제공하는 끊임없이 유동하는 무수한 네트워킹은 모든 것을 동시에 연결해버려 선형적 시간 감각을 마비시킨다.

이처럼 영원한 현재를 살게 된 우리가 과거마저도 현재적으로 유희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빛의 속도로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성격을 띨 수 없는 것들마저도 그렇게 되어가는 놀라운 광경 앞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감각까지 잃지는 말아야 한다. 목적도 방향도 없이 육박해오는 무수한 현재를 자연재해처럼 견디게 된 우리의 처지가 과연 자연스러운 것인지 의심할 수 있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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