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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레깅스와 ‘김지영’의 아버지

등록 2019-11-03 15:33수정 2019-11-04 02:35

흔히 여성용이라 여겨지는 ‘레깅스’는 원래 다리를 감싸는 다양한 형태를 두루 가리켰던 용어다. 미국 카우보이들은 말을 타면서 입는 상처 등을 방지하기 위해 사슴 가죽으로 만든 레깅스를 꼈다. 19세기 말 전쟁터에서 보병들이 종아리 아래 두른 각반 역시 레깅스라 했다. 서구에서 대중적 확산은 1970~80년대 신축성 있는 소재인 라이크라와 에어로빅의 유행에 힘입은 바 크다. 짧은 바지나 치마를 덧대 입는 방식을 넘어, 10여년 전부터는 단독의 일상복으로 입는 10~20대 여성도 늘었다. 미국에선 2017년 레깅스 수입량이 청바지 수입량을 제쳐 ‘청바지 이후 최대 패션’이 됐을 정도다. 레깅스만은 아니지만 한국에서도 애슬레저(일상복으로 입는 운동복) 시장 규모는 최근 8년 사이 4배로 늘며 하나의 트렌드가 됐다.

인기만큼 논쟁도 커졌다. 2013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서노마 카운티, 2015년 오클라호마주 등 학교에서 하의로 레깅스만 입는 것을 금지했다. 2년 전엔 레깅스 차림의 10대 소녀들이 유나이티드 항공 탑승을 저지당했다. 지난 3월 미국 인디애나주 노터데임대 대학신문에 아들 넷의 어머니라는 이가 “젊은 남자들이 그들을 무시하는 게 얼마나 힘들겠냐”며 캠퍼스 내 레깅스 차림을 자제해달라고 쓴 공개 편지는 에스엔에스(SNS)에 거센 반발 시위를 불러오기도 했다.

‘일상복이야 아니냐’는 현대 레깅스 논쟁의 바탕엔 여성 옷이 남성의 부적절한 행동에 책임이 있다는 오래된 인식을 둘러싼 ‘전쟁’이 있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에서도 쫓아온 남학생을 겨우 피한 딸에게 아버지는 “치마가 짧잖아. 절대 아무나 보고 웃으면 안 돼”라며 “바위가 굴러오는데 못 피하면 못 피하는 사람 잘못”이라고 말한다.

최근 버스 안에서 레깅스 차림 여성의 뒷모습을 불법 동영상 촬영한 남성이 2심에서 무죄를 받은 것을 두고 논란이 거세다. 재판부는 ‘레깅스가 스키니진처럼 일상복이 되었고 (살이) 노출된 부분도 거의 없다’며 성적 수치심과 무관하다는 이유를 댔다. 그동안의 레깅스 논쟁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언뜻 ‘진일보한’ 판단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성들이 레깅스를 ‘일상복’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입을 자유뿐 아니라 남의 시선에서 자유로움 또한 의미하는 것 아닌가. 여성의 의사에 반한 불법 촬영이 핵심인 사안에 낡은 ‘수치심’ 잣대를 들이댄 셈이다.

김영희 논설위원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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