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짝퉁

등록 2019-11-26 18:17수정 2019-11-27 17:46

전우용 ㅣ 역사학자

“경고! 가짜 거북선표가 많사오니 속지 마시고 거북선표를 사실 때에는 아래 그림과 같이 거북선 상표에 물결 바닥을 사십시오.” 1931년 거북선표 고무신의 광고 문안이다. 그 무렵 고무신 시장에서는 서울고무공사가 생산 판매하는 거북선표의 인기가 가장 높았다. 바닥을 물결 모양으로 만들어 미끄러짐을 줄였을 뿐 아니라, 거북선을 상표로 써서 조선인 소비자의 민족주의 감성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고무신 상인들이 다른 공장 제품을 거북선표라고 속여서 팔기 시작했고, 서울고무공사는 가짜를 조심하라는 광고를 냈다. 아마도 이 광고에는 거북선표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려는 의도도 숨어 있었을 것이다.

1902년 서울에 들어와 땔감 장수로 큰돈을 벌었던 프랑스인 폴 플레장(당시 표기 ‘푸레상’)과 안톤 플레장 형제는 ‘부래상’(富來祥) 상회를 설립하고 1920년대부터 프랑스산 향수와 화장품 등을 수입해 팔기 시작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과 프랑스 사이의 교역이 중단되자 부래상 상회는 경성역 인근에 비밀 공장을 차리고 직접 화장품을 생산한 뒤, ‘세봉’이라는 가짜 상표를 붙여 프랑스제인 것처럼 팔다가 발각되었다. 1939년 경성지방법원은 폴 플레장에게 사기, 상표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1956년, 부산의 국제양조장이 일본에서 수입한 향료와 색소, 주정을 배합하여 국산 위스키를 개발하고 ‘도리스’라는 상표를 붙여 판매했다. 도리스는 당시 미군 피엑스(PX)를 통해 수입되어 국내 위스키 시장을 장악했던 일본 산토리사의 제품 이름이었다. 4년간 수수방관하던 한국 경찰은 1960년 갑작스럽게 일본 상표권 침해를 문제 삼아 회사 대표를 구속했고, 회사 쪽은 어쩔 수 없어 상품명을 도리스와 비슷한 도라지로 바꾸었다. 1960~70년대 국산 양주의 대명사 격이었던 ‘도라지 위스키’가 탄생한 경위이다.

유명세(有名稅)가 붙은 상품들에 가치보다 높은 가격이 붙는 것은 현대사회의 보편적 현상이다. 탈세하려는 욕망은 유명세에 대해서도 예외일 수 없다. 가짜 유명 제품, 또는 유사 유명 제품들이 ‘짝퉁’이라는 속어로 불린 건 20여년 전부터인데, 이 단어는 이제 버젓이 국어사전에 올라 있다. 짝퉁은 명목과 실질 사이의 괴리를 당연시하는 시대의 필수 구성 요소이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