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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스위스 비밀계좌와 한진 일가의 민낯 / 안재승

등록 2020-01-07 18:44수정 2020-01-08 02:07

돈의 성격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고객 정보를 완벽히 지켜준다는 스위스 은행 비밀계좌의 역사는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가 1685년 신교도의 종교 자유를 보장하던 ‘낭트 칙령’을 폐지하자, 신교도들이 스위스로 옮겨가 은행업을 시작했다. 그 뒤 영토 확장을 위해 자금이 필요해진 루이 14세가 스위스 신교도들의 은행에서 돈을 빌려야 할 처지가 됐다. 그는 자신이 추방한 신교도들에게 돈을 빌리는 사실을 숨기려고 비밀 보장을 요구했고, 이게 비밀계좌의 출발이 됐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프랑스 귀족과 부자들이 몰리면서 스위스 은행은 가장 안전한 보관처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스위스 정부는 1934년 아예 법으로 비밀주의를 명문화했다. 당시 유대인들이 스위스 은행에 돈을 많이 맡겼는데, 나치 정권이 눈독을 들이자 이를 막기 위해서였다. 스위스 은행 비밀계좌는 실명을 쓰지 않고도 계좌번호와 비밀번호로만 개설할 수 있다. 대신 예금주가 사망하더라도 상속인이 계좌번호와 비밀번호를 모르면 유산을 물려받을 수 없다.

스위스 은행 비밀계좌가 국내에 알려진 것은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가 1978년 작성한 ‘프레이저 보고서’가 계기가 됐다. 보고서는 박정희 대통령과 측근들이 각종 이권 사업을 통해 기업들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고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스위스 은행 비밀계좌에 예치했다고 폭로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이를 부인했다. <프레이저 보고서>는 국내에서 2014년 완역 출간됐다.

탐사보도전문매체인 <뉴스타파>는 2013년 한국인이 조세피난처에 설립한 페이퍼컴퍼니 369개를 분석한 결과, 가장 많은 31개가 스위스 최대 투자은행인 유니온뱅크오브스위스(UBS)를 이용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스위스 은행도 이제 더는 검은돈의 안전한 피신처가 아니다. 비밀계좌의 폐해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 여론이 커지면서 스위스는 2015년 유럽연합(EU)과 비밀주의를 폐지하고 계좌 정보를 공유하기로 했다. 이에 앞서 우리나라는 2012년부터 스위스와 맺은 조세조약에 따라 과세 관련 금융 정보 교환이 가능해졌다.

3세들의 ‘경영권 분쟁’으로 지탄받는 한진그룹이 이번에는 2세들의 ‘스위스 은행 비밀계좌 탈세’ 논란으로 시끄럽다. 고 조중훈 창업주가 스위스 은행 비밀계좌에 예치한 5천만달러(약 580억원)를 조양호 회장 등 5남매가 2002년 상속하면서 세금을 탈루한 혐의를 국세청이 2018년 적발하고 가산세를 포함해 852억원의 세금을 부과했다. 한진그룹은 그해 5월 “세금을 5년간 분납하기로 하고 1차로 192억원을 납부했다”고 보도자료까지 냈으나, 두 달 뒤 5남매가 “상속 당시 스위스 은행 계좌의 존재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과세 시효가 지났다”며 조세심판원에 불복 심판을 청구한 사실이 최근 확인됐다. 한진 총수 일가의 몰염치는 끝이 없는 것 같다.

안재승 논설위원 jsahn@hani.co.kr

▶ 관련 기사 : 한진 “스위스 계좌 852억원 상속세 부당” 불복소송,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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