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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2030 리스펙트] 이미 충분하다는 당신에게 / 홍진아

등록 2020-02-16 18:45수정 2020-02-17 02:35

홍진아 ㅣ 커뮤니티 서비스 ‘빌라선샤인’ 대표

얼마 전, 운영하는 서비스인 빌라선샤인에 대해 설명할 일이 있었다. 설명을 듣던 상대방이 “여성들끼리 모여서 커뮤니티 활동을 한다는 것은 잘 알겠는데, 왜 남성 강연자들을 배제하세요?”라고 물었다. 누가 누구를 배제한다는 말인가. 드러나지 않고 있었던 여성 전문가들에게 돌아갈 제대로 된 무대를 만들려는 노력, 밀레니얼 여성이 또래의 여성 전문가를 만나서 더 구체적으로 자신의 커리어 패스를 그려갈 기회를 제공하려는 전략이 배제라는 단어로 일축되어버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빌라선샤인이 가지고 있는 미션과 이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가 여성 전문가들만 무대에 세우는 이유를 다시 설명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이것이었다. “빌라선샤인의 고객들도 남성 전문가를 만날 권리가 있잖아요.” 공들인 나의 설명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남성 전문가란 무엇인가. 남성 전문가와 여성 전문가의 전문성은 다른가. 권리를 행사해야 할 만큼 남성 전문가를 만나는 것이 여성들에게 절실한 일일까. 권리라는 것은 ‘어떤 일을 자유로이 행하거나 타인에 대하여 당연히 주장하고 요구할 힘’을 말하는 것인데, 우리는 일상에서 이미 너무 많은 남성 전문가를 만나고 있다. 굳이 권리를 행사하지 않아도 될 선택지를 가졌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인데도 빌라선샤인이 만드는 무대가 권리를 주장해야 할 정도의 질을 가졌다고 생각한다면, 여성 전문가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어쩌면 생각을 정리할 수 있을 정도의 경험이 없을 수도 있다. 우리가 가진 경험을 일반화하기엔 경험의 양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주장하는 권리는 배제의 다른 말일 수 있다.

남성들의 영역이었던 곳에 여성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니, 이미 존재했지만 적절한 자리에 드러날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인제야 자기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는 말이 더 맞을 수 있겠다. 그렇게 조금씩 시작된 행보에 ‘이미 충분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10명의 강연자 중 여성이 2명이고, 모두 남성 교수였는데 여성 교수가 생겼고, 여성 대표와 여성 장관을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고. 하지만 이제 시작인 것과 충분한 것은 다른 이야기이다.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미국의 대법관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여성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차별과 불합리를 이기고 대법관이 된 뒤, 그는 “여성 대법관이 몇명이 있어야 충분하죠?”라는 질문을 받는다. “9명이 될 때”라고 대답하며, 오랫동안 대법관 9명 모두 남성이었던 것을 지적했다. 모두 여성이 되어야 충분하다는 말이 아니다. 여성들이 편견이나 고정관념의 방해 없이 자신의 자리를 찾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4월에 있을 총선을 앞두고 각 당에서 예비후보들이 나오고 있다. 청년 여성들의 활약이 기대되는 당도 있고, 또 이렇다 할 후보를 내지 못하며 ‘여성의 권리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충분히 했다’고 얘기하는 당도 있다. 이야기가 시작된 것과 충분히 한 것을 또 헷갈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자. 나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아직 충분하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인물과 당을 찾아 나의 한 표를 행사할 것이다. 이것이 이번 총선에서 내 권리를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충분한 방법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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